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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99
한자 金福用
이칭/별칭 김공량
분야 종교/신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김복용 목천 세성산 전투 지휘
성격 종교인|동학 지도자
성별
대표 경력 동학군 효장

[정의]

개항기 세성산 전투를 이끈 천안 출신의 동학 지도자.

[개설]

김복용(金福用)[?~?]은 병천 출신의 동학 지도자이다. 김공량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이희인(李熙人)과 함께 목천 세성산 전투를 지휘하였다.

[활동 사항]

1894년 남접의 2차 봉기가 일어나자 김복용(金福用)이희인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목천현·천안군·전의현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양곡을 거두어, 작성산세성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세성산 전투를 지휘하였다.

김복용은 함께 세성산 전투를 이끌었던 이희인처럼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군사 지휘력은 탁월하여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할 때는 언제나 선두에서 지휘를 하였다. 세성산에서 관군이 노획한 많은 무기와 양곡만 보더라도 김복용의 탁월한 지휘 능력을 알 수 있다.

세성산 동학 농민군의 편성은 이희인이 전반적인 행정을 맡은 수반이었고, 김복용이 효장(驍將)을 맡아 전투를 수행하였다. 당시 관군의 공격에 맞서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동학 농민군은 해질 무렵 진지를 버리고 패전하였다. 이후 동학 동민군은 세성산의 거점을 잃고 며칠 후 공주 우금치 전투의 패전을 겪게 되었다.

김복용세성산 전투에서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고 정부에 보고되었다. 그런데 『천안 독립운동사』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김복용은 부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산골짜기에서 처형당하려 할 때 많은 뇌물을 써서 풀려났다고 한다. 사형 집행에 임했던 군사들은 김복용을 처형한 것으로 위장하고 먼 곳에 가서 이름을 바꾸어 살라고 하였고, 김복용은 그길로 강원도로 들어가서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고 한다. 한편 김복용과 절친했던 김위경이라는 사람이 강원도에 도피한 김복용과 연락을 취하여 흩어진 김복용의 가족을 몰래 찾아서 강원도로 보내 주었고, 김복용의 재산을 정리해서 전달하였다고도 전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1.12 오류 수정 [활동사항]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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