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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03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제연

[정의]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시기의 천안 지역의 역사.

[행정 구역의 변천]

1914년에 천안군(天安郡)·목천군(木川郡)·직산군(稷山郡)이 통합되어 천안군이 되었고, 1963년에 천안시와 천원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1년에 천원군천안군이 되고, 1995년에 다시 통합되어 현재의 천안시가 되었다. 따라서 1914년 이전의 천안시 지역은 천안(天安)·목천(木川)·직산(稷山) 지역이 각각 독립적인 단위였다. 특히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전에는 천안보다 직산이나 목천이 천안 지역의 중심지였다. 조선 건국 후 각 군현의 연혁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직산은 1393년(태조 2)에 이곳 사람 환관 최연(崔淵)이 명나라에 들어가 사명(使命)을 완수하고 사신이 되어 오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으나, 그 뒤 1401년(태종 1) 강등시켜 감무를 두었고, 1413년에 현감으로 고쳤다. 1505년(연산군 11)에 경기도에 예속되었다가 1506년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직산현에서 승격하여 군(郡)이 되었다가 1914년 천안군으로 병합되었다.

목천은 고려 시대 청주에 속해 있던 목주(木州)를 1413년(태종 13)에 목천(木川)으로 고치면서 종전의 감무 대신 현감이 파견되기 시작했고, 1895년(고종 32)에 목천현에서 목천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에 천안군에 합병되었다.

천안은 1413년(태종 13)에 영주(寧州)를 영산군(寧山郡)으로 고쳤고, 1416년 천안군으로 고쳐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시대 천안 지역이 천안, 목천, 직산의 3군현 체제를 기본적으로 유지하였지만 시기에 따라서 일시적인 변동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직산은 1505년부터 일시 경기도에 소속된 적이 있었으며 광해군 대에는 경기의 평택현이 직산에 병합된 적도 있었다. 목천은 1555년(효종 6) 아버지를 살해한 자의 출신지라 하여 폐현되어 전의에 소속되었다가 1664년(현종 5) 복구되고, 1685년(숙종 11)부터 5년간은 진천에 병합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과정에서 직산이 경기의 평택 지역과, 그리고 목천이 충북 지역과 서로 연결되는 상황에 의해서 천안, 직산, 목천 각 지방의 역사적 흐름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구와 토지]

조선 시대 천안 지역 3개 군현의 경제적 규모를 이해하려면 호구와 토지에 대한 통계 수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호적 제도의 발달과 더불어 호구 조사 제도도 발달되어 주기적으로 실시하도록 제도화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1428년에 호적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어 3년마다 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고, 지역적으로 호구 조사의 결과를 볼만한 자료가 지금까지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천안 지역의 3개 군현의 호구 관련 기록은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700년대의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호구 총수(戶口總數)』에서만 확인되며, 토지 면적에 대해 전반적으로 통계를 낸 것도 마찬가지이다.

15세기 세종 대의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천안은 506호(戶), 2,385구, 목천은 404호, 2,186구, 그리고 직산은 553호, 2,111구로 되어 있다. 이를 다시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에서 살펴보면 천안은 3,472호, 1만 1557구, 목천 3,640호, 1만 5251구, 직산 3,150호, 1만 2881구라 하였다. 1789년의 『호구 총수』 자료에 의하면 천안 3,615호, 1만 2285구, 목천 3,344호, 1만 6504구, 직산 3,345호, 1만 4876구라 하였다. 이로 보면 조선 시대 천안, 목천, 직산은 군현 위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는 비슷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안 지역의 조선 시대 전결 통계를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통해 살펴보면 천안은 5,158결, 목천 3,017결, 직산 5,446결로 되어 있고 다시 18세기의 『여지도서』에 의하면 천안 5,260결, 목천 3,964결, 직산 5,838결로 되어 있어 호구 통계와는 달리 시기에 따른 변화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천안 지역의 행정 구역은 오늘날과 같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하나의 테두리 안에 있는 공간이 아니라 고을 경계와 동떨어진 지역에 있는 월경지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즉 다른 고을 경내에 있는 땅이 천안에 소속되어 있는 식이었다. 월경지는 고려 현종 때에 생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규모가 큰 고을과 서해안·남해안 등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대개 생선·소금과 같은 물자의 조달 문제, 조운(漕運)·조창(漕倉)과의 관계 때문에 정리되지 못하고 한말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1906년 지방 구획 정리 건에 관한 칙령에 따라 완전 정리되었다.

천안과 직산에는 각각 월경지가 존재하였다. 월경지는 아산, 온양, 예산 지역에 위치하였는데 주로 해안에 접한 지역으로서 천안에 어물을 공급하고, 세곡선을 대던 곳으로 추정된다.

[교통]

후삼국의 패권이 고려로 넘어가면서 한반도의 중심이 중부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그 이후 천안 지방은 한반도 중부에서 남부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천안이라는 행정 단위는 고려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천안 삼거리’의 명성도 이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교통 요지로서의 천안은 경기 일원에서 영남·호남으로 갈 때는 경유하는 지점이었다. 성환역(成歡驛)을 통하여 직산 고을로 들어서서 천안 삼거리에 이르러 서쪽의 차령(車嶺)을 넘으면 공주와 호남으로 가게 되고, 동쪽의 청주를 거쳐 추풍령을 넘으면 경상우도(慶尙右道)를 향하게 된다. 또한 충청우도(忠淸右道) 내포 지역의 중심지였던 홍주(洪州)를 가기 위해서도 천안을 지나 아산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려 이후 천안 지방은 삼남의 관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된 역사 유적은 성환역, 직산현 문루[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42호인 직산현 관아의 외삼문인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 천안 삼거리, 광덕면차령 고개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에서도 성환역은 충청우도의 찰방 역으로 주변의 여러 역원을 관할하는 중요한 국가 시설이었다. 온양 온천과 청주의 약수터로 가는 국왕의 행차를 비롯해 유명 인물이 이곳에 머물렀고 그에 관한 기록도 다수 전한다. 특히 현종의 온양 행에 대해서 송시열의 「화축관기문(華祝館記文)」과 직산 「영소정기문(靈沼亭記文)」이 남아있다. 이 길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군대의 이동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천안 삼거리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현재 천안의 상징과도 같다. 천안 삼거리는 우리나라 삼남 대로의 분기점이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로가 천안에 이르면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길은 병천을 거쳐 청주로 들어가 문경 새재를 넘어 상주를 통해 영동, 김천을 지나 대구 감영, 경주, 동래로 통하는 길이요, 한 길은 공주 감영을 거쳐 논산, 전주, 광주, 순천, 여수, 목포 등지로 통하는 대로이다. 관리부터 백성까지 많은 사람이 쉬어 가기도 하던 곳으로 천안 삼거리는 갖가지 전설과 민요를 낳기도 하였다.

[성씨]

조선 시대 천안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은 각종 사료와 남아 있는 유적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지역 사료인 지리지의 성씨 조, 인물 조를 통해 그 지역의 주요 성씨와 출신 인물을 알 수 있다.

지리지에 기록된 각 군현의 성씨를 보면, 시기별로 성씨의 수가 증가 또는 감소하기도 하고 그리고 순서가 뒤바뀌기도 한다. 이것은 이것을 기록한 사람의 의지가 아닌 당대 이 지역 성씨의 위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세 군현 중 가장 큰 변화를 보이는 것은 천안군이다. 천안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없던 여러 성씨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며, 토성의 순위가 바뀌었다가 또다시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에서는 천안 본군의 토성 7개만 등재되기도 했다. 돈의, 모산, 신종, 덕흥 등은 천안의 월경지가 있던 곳으로 현재의 아산과 예산에 속한 곳이다. 따라서 『여지도서』에서는 이곳의 성씨들은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목천현의 성씨는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에 목주 사람이 여러 번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모두 짐승 이름으로 성을 내렸다. 뒤에 우(牛)는 우(于)로 고치고, 상(象)은 상(尙)으로 고치고, 돈(豚)은 돈(頓)으로 고치고, 장(場)은 張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있어 각 성씨의 유래가 상세하게 나타난다. 직산현의 백씨(白氏)에 대해서는 고려 말 정당문학(政堂文學) 충간공(忠簡公) 백문보(白文寶)의 성씨라는 점을 추기되어 있다.

[국가 전란과 천안지역]

천안 지역은 삼남의 요충이었으므로 전란의 와중에 군대가 이동하는 주요 길목이 되었다. 조선 시대 전 국토를 혼란에 빠뜨렸던 가장 큰 전쟁인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에는 직산 전투가 벌어져 이김으로써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직산 전투는 남하하는 명군과 북상하던 일본군이 직산에서 마주쳐 벌어진 전투였다. 명나라 군사 중에는 조선 관군이 포함되어 있었고 직산 현감은 군량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중국 측에서 임진왜란 3대 전투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때의 승리로 일본군은 한성 침략을 포기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국내에서 벌어진 역모 사건인 이몽학의 난은 충청도 일대의 여러 고을 사람들이 호응했던 대규모 반란이었다. 난이 진압된 후 국왕 선조는 동지의금부사 윤승훈(尹承勳)을 직산으로 보내어 죄인들을 심문했다. 아마도 직산이 호서의 첫 관문이었으므로 충청도 일대의 죄인을 신속하게 끌어오기 수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직산에 사는 홍응기(洪應沂)와 부장(部將) 홍난생(洪蘭生) 등 7인은 반란군의 우두머리를 체포하기 위해 자신들의 무리를 반란군 중에 투입시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624년 인조반정 직후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이괄이 내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천안 지역은 역사적 무대가 되었다. 반란군이 승승장구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게 되었는데, 이때 천안을 지나는 노선을 택하였다. 대가가 직산을 거쳐 천안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관군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공주에 머물렀다가 다시 돌아올 때에도 직산에서 유숙하였다.

조선 후기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정권에서 배재된 소론과 남인 일부 세력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가 우두머리 역할을 하였으므로 이인좌의 난, 또는 무신 난이라 불리는 이 사건 속에서는 목천이 주목된다. 목천은 충청우도의 다른 고을과 달리 남인 세력이 강한 곳이었으므로 청주에서 시작된 반란 세력은 거리상 가깝고 사족의 성향도 비슷한 목천 사람들이 호응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반군이 안성으로 향하면서 가장 먼저 목천을 점령하려 하였다. 목천 현감은 도주하였고 목천 사족 16인이 뜻을 모아 의병이 되어 반군과 전투를 벌였다. 의병 부대와 반란군은 석교 평야에서 접전을 벌였고 마침내 의병이 승리하니 후에 나라에서 이들을 공신에 봉하였다.

한말에 동학군과 관군의 접전이 벌어졌던 목천 세성산 전투, 그리고 청일 전쟁 시기 인천으로 상륙했던 일본군과 아산만의 청군 간에 벌어진 성환역 전투와 월봉산 전투 역시 천안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면서 교통 요지라는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 시대의 주요 전란 속에 천안 지역은 안전할 수 없었고, 많은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