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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007
한자 東學農民運動-細城山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동학 농민 운동 세성산 - 충청남도 천안시 지도보기

[개설]

동학 농민 운동이 한창이던 1894년 11월 18일[음력 10월 21일]에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세성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세성산은 목천(木川)[지금의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성남면] 사이에 있는 산이며, 넓게 보면 청주(淸州), 공주(公州)의 서북부 중간에 위치하는 산이다. 특히 서울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북접(北接) 산하의 동학 접주(東學接主)인 김복용(金福用) 등이 세성산을 차지하고 지키고 있어 그 기세가 대단했던 곳이다.

세성산에 있던 동학군(東學軍)들이 호기(好期)를 포착해 북상한다면 수도 서울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반대로 관군 측이 동학군들을 공격한다면 동학군 전체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세성산 전투의 발생 원인]

동학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천안까지 진주한 관군의 선봉장 죽산부사인 이두황은 하루라도 빨리 목천의 동학군을 공격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공동 작전을 계획한 일본군이 해로(海路)였던 내포(內浦) 방면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홍주(洪州)[지금의 홍성]로 진격하면서 계획이 틀어져, 이규태(李圭泰)는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11월 18일[음력 10월 21일] 목천 세성산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세성산 전투의 전개]

당시 의병 통령(義兵統領)이었던 윤영렬의 첩보에 따르면 “천안 남쪽 소거리 거주 전 도사 김화성이 1883년(고종 20)부터 보은 최시형을 도주로 섬기며 목천 복구정 대접주(大接主) 김용희, 김성지와 결의를 맺고, 동학 포교에 정력을 바쳤다. 그리고 자칭 동학 삼로라고 하였다. 이들은 상당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경전의 배포가 포교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동경대전의 중간(重刊)을 서둘렀다.”라고 했다고 한다.

각 포에서 돈 6천 냥을 모금하여 『동경대전』 100권을 간행하고, 30권은 교주 최시형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김화성과 김용희가 반으로 나누어 포교에 활용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은 의병 통령 윤영렬이 세성산 전투가 있은 후 도사 김화성을 잡아 문초하여 얻은 내용이다.

김화성은 아들 김중칠 등 삼형제와 사위 홍치엽도 동학에 가담하게 하여 온 집안이 동학의 포교와 혁명에 가담했다. 김화성은 장자 김중칠을 8도 도대정으로 삼고, 사위 홍치엽은 교장으로 삼았으며, 나채익과 이선을 등을 소임으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혁명을 수행하고 일본군과 대결하려면 무기의 조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대장장이와 무기공을 불러들여 장창(長槍)과 화포(火砲)를 주조했다.

그리고 동학교도들을 인솔하고 천안, 목천, 전의 세 고을을 습격해 군용 물자(軍用物資)를 탈취하여 세성산으로 운반하였다. 흔히 군용 물자는 무기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들이 탈취한 물자는 무기에 국한되지 않고, 장기 항전에 대비하기 위해 곡식과 포목, 우마(牛馬) 등을 비롯해 탈취한 군용 물자의 숫자가 상당했다고 한다.

세성산(細城山)은 남·동·북 3면이 험준하고, 서쪽만이 풀이 무성하게 자란 넓은 벌판이기 때문에 관군 측은 2개 소대를 산의 북쪽 기슭에 매복하게 했다가 동북과 동남에서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동학군은 부득이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북쪽 기슭 복병의 추격을 받아 전사자 370여 명, 전상자(戰傷者) 4백여 명이 발생하는 큰 패배를 당했다. 그와 동시에 북접의 효장 김복용까지 포로가 되어 참형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 세성산 전투는 일본군의 근대적인 지연 유도 작전에 북상로(北上路)가 차단되어 동학군의 제1진이 참패한 전투로, 전군(全軍)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참혹한 전투였다.

[세성산 전투로 체포된 인물들]

세성산 전투로 체포된 동학군의 인물은 상당히 많다. 의병 통령 윤영렬이 김화성을 체포하던 날 천안 원거리에 거주하던 김나귀, 김순경, 임만진 등 세 사람도 체포하였다. 이중 김나귀와 김순경은 동학군에서 활약을 많이 했던 인물이었다. 임만진은 관군의 무기를 동학군에게 넘기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경내의 조관사부를 결박해 직접 문초하기도 했다. 그래서 관군이 임만진을 잡아 압송할 때 멀리 압송하다가 도중에 실수할까 두려워 ‘목천 세성산 장위영 영관에게 직송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동학의 중진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은 세성산의 효장 김복용 밑에서 중군을 맡았던 김영고, 화포 대장 원전옥이다. 그들은 별기군(別技軍)에게 잡혀 목천 현감 정기봉에게 넘겨져 효수되었다.

[세성산 전투의 실패 원인]

효장 김복용, 중군 김영고, 화포 대장 원전옥은 실전 경험이 없어 세성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못하고, 관군과 정면 대결을 했다가 참패를 당했다. 이제까지 동학 혁명군은 호남의 1차·2차 봉기에서 모두 승리했기 때문에 정면 대결을 했던 것이다.

또한 세성산성에 자리를 잡은 까닭은 수성(守城)의 이(利)를 얻자는 것인데 관군을 얕잡아 보고 전투에 임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세성산 전투에 투입된 관군은 호남에 출동했던 부대와는 달리 별기군이었기에 좀 더 신중하게 수성으로 임했다면 동학군이 병기가 많았기 때문에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세성산 전투가 오랜 시일을 끌었으면 우금치 전투도 유리한 국면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성산의 패전은 실전 경험이 없는데서 온 참패라 할 수 있다.

세성산 전투 당일 김복용을 따르던 신정문, 송석태, 진한식, 박영식, 박계선, 임순용, 이언여, 안덕인, 김정헌, 진암회, 김경백, 김수여, 이진여, 고춘일, 임오일, 김형옥, 김순경 등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또한 목천의 김춘일, 김치희, 직산의 서성만은 관군과 백성이 지켜보는데서 효수하여 민중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1.12 오류 수정 [개설][세성산 전투의 전개]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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