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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08
한자 朴文秀
이칭/별칭 성보(成甫),기은(耆隱),충헌(忠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1년연표보기 - 박문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23년 - 박문수 증광시 문과 급제·예문관 검열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24년 - 박문수 삭직
활동 시기/일시 1727년 - 박문수 정미환국 후 세자시강원 사서로 복직
활동 시기/일시 1728년 - 박문수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무공신에 책봉
활동 시기/일시 1730년 - 박문수 대사성·대사간·도승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39년 - 박문수 함경도 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51년 - 박문수 예조 판서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56년연표보기 - 박문수 사망
묘소|단소 박문수 묘 -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은지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고령
대표 관직 도승지|호조 판서|예조 판서|병조 판서|판의금부사

[정의]

조선 후기 천안 지역에 묘소를 쓴 문신.

[개설]

박문수(朴文秀)[1691~1756]는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 활동했던 정치가로, 호포제의 주장과 탕평론에 적극 동참하는 등 일찍부터 국정의 개혁에 적극적이었다. 박문수가 관직 활동을 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이 격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박문수는 소론의 당색을 가지고 당론을 가장 추종하던 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 있어서는 당론에 앞서 공(公)을 중시하였던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판서를 지낸 박장원(朴長遠), 할아버지는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지낸 박선(朴銑)이다.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박항한(朴恒漢)이며, 어머니는 공조 참판을 지낸 이세필(李世弼)의 딸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박문수는 1723년(경종 3)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 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 이후 다시 사서(司書)에 등용되었으며, 영남의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이듬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봉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하여졌으며,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 당상이 되었고, 1734년 예조 참판 재직 중에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 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병조 자체의 관인(官印)이 없어 군무의 신속한 입송(入送)에 불편을 줄 뿐 아니라 중간에 간사한 관리가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많았는데, 박문수는 군기의 중요성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이 야기될 수 있음을 들어 병조 판서의 관인(官印)과 이군색(二軍色)의 관인을 만들어 줄 것을 주청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다시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 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 부사로 좌천당하였다. 1739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1741년 어영대장을 역임하였으며, 함경도에 진휼사로 나아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 어영대장에 제수되었으며, 1749년 호조 판서로 재임 시에는 국가적으로 대내(大內)의 당우(堂宇)를 3년에 한 번씩 수리하는 일의 책임관으로서 역대 어느 관료보다 일을 잘 처리하였다는 칭송을 받았다.

1750년 수어사(守禦使)를 역임한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세손 사부(世孫師傅) 등을 지냈고, 1751년 예조 판서가 되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 제조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에 안치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 우참찬에 올랐다.

박문수는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으며, 영조 대 탕평책이 실시될 때 명문 중심의 인사 정책에서 벗어나 4색 당파에 속한 인사들을 균등하게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군정과 세정(稅政)에 밝아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무엇보다 당색을 떠나 공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는 사실과 뛰어난 실무 관료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학문과 저술]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간행하였다. 이것은 『각전 각궁 공상 정례(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國婚定例)』 2권, 『각사 정례(各司定例)』 12권, 『상방 정례(尙方定例)』 3권을 합한 것이었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 토적 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은석산에 묘소가 있다. 은지리 일대는 박문수의 사패지로 주변에 고령 박씨가의 묘역이 조성되고 관리인이 거주하였다. 묘소 아래에는 재실이 있는데 처음에는 박문수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가 뒤에는 고령 박씨 종중 재실로 발전하였다. 묘소는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61호, 재실은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89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암행어사로 활약하였던 행적이 설화로 많이 전하고 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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