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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616
한자 朴文秀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상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91년 - 박문수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756년 - 박문수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박문수 묘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61호로 지정
현 소재지 박문수 묘 -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은지리 지도보기
성격 분묘
관련 인물 박문수
봉분 크기/묘역 면적 165㎡[묘역 면적]
소유자 박재삼
관리자 박재삼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61호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박문수의 묘.

[개설]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일대는 박문수(朴文秀)[1691~1756]의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려준 논과 밭]로 알려져 있다. 박문수는 조선 후기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에 녹훈되면서 이 지역의 땅을 하사받았고 사후에 은지리 은석산에 장사 지내면서 고령 박씨(高靈朴氏)가 천안에 거주하게 되었다. 묘 자리를 박문수 스스로 정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위치]

천안시 북면사무소에서 국가 지원 지방도 57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9㎞ 거리의 삼거리에서 좌측 진천 병천 방향으로 약 1㎞를 가면 좌측으로 은지리 입구가 있다. 이곳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 은석산으로 오르면 산 정상부에 박문수 묘(朴文秀 墓)가 위치한다.

[변천]

박문수의 집안은 원래 대대로 황해도 장단에 살았다. 박문수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면서 목천의 은석산 주변 일대의 토지를 하사받았고, 묏자리를 이곳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전설에는 ‘샘터’라는 곳에 묘를 쓰려 하였는데 누군가가 대감의 격에 맞는 더 높은 곳을 택하라 충고하여 현 위치로 정하였다고 한다.

1756년 박문수가 사망하자 영조는 매우 슬퍼하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이는 영성[영성군(靈城君). 이인좌의 난 진압 후 공신으로서 받은 봉호]이었다며 박문수의 충성심을 높이 사고, 벼슬이 경재(卿宰)에 그친 것을 애석해 하였다. 또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諡號)를 즉시 내리고 상례를 예에 따라 거행하기를 명하였다. 박문수의 아들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고 제문(祭文)은 친히 내리면서 상례(常例)에 구애되지 말고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상복을 입음]이 지난 뒤에 즉시 치제(致祭)[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하라 하였다.

묘역의 석물(石物)을 배치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묘비명이 쓰인 것은 1756년이다. 그런데 묘역 앞의 안내문에는 묘비를 1816년(순조 16)에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묘비명에는 ‘숭정기원후 삼병자월 일립(崇禎紀元後三丙子月日立)’이라 하여 분명히 1756년이 맞다. 비문을 지은 이는 이종성(李宗城)[1692~1759]이고, 쓴 사람은 이종덕(李宗德)[1711~?]이다.

[형태]

박문수 묘는 하나의 봉분이며 정면에 화강암 2매를 겹쳐 만든 150㎝×40㎝ 규모의 상석과 상석 앞에는 향로 형태의 석물이 있다. 묘의 좌우에 망주석과 무인석이 있고 묘의 전면 우측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는 방형 기단(基壇)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옥개형 이수(螭首)[뿔 없는 용의 모양을 새긴 형상]를 올린 형태이다.

[금석문]

묘비의 전면에는 ‘조선 행병판서 영성군 증영의정 충헌 박공 문수 묘(朝鮮行兵判書靈城君贈領議政忠憲朴公文秀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과 좌우 옆면에는 박문수의 일대기와 가계를 기록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박문수의 묘는 문화재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므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많으며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묘역이기도 하다.

[의의와 평가]

박문수는 청백리이며 영조 대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을 세워 공신으로 녹훈되었고, 암행어사 전설로 유명한 인물이다. 박문수 묘는 천안시를 상징하는 역사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