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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3000
한자 慰禮山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지명/자연 지명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원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구간 위례산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동남구 북면 운용리
해당 지역 소재지 위례산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 지도보기
해당 지역 소재지 위례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
성격
높이 523m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동남구 북면 운용리의 접경부에 있는 산.

[개설]

위례산(慰禮山)[523m] 정상부에 위례성(慰禮城)이 있다. 하지만 이 성이 백제 온조왕이 세웠다는 위례성 또는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따르면, 온조왕 13년(BC 6년)에 왕이 신하들에게 “동쪽의 낙랑(落浪)과 북쪽의 말갈(靺鞨)이 자주 침범하니 한수(漢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한 뒤,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백제의 첫 도읍지가 직산이라 하였다.

학자들은 대체로 하남 위례성이란 ‘강 남쪽의 위례성’이라는 뜻이며, 여기서의 강은 지금의 한강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의 도읍은 처음부터 한강 남쪽에 있었던 셈이 된다. 하지만 온조왕위례성에서 한강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또 다른 기록에 따른다면, 위례성은 한강 북쪽의 하북 위례성과 한강 남쪽의 하남 위례성으로 각각 나뉘게 된다. 지금 역사학계는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위례성이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울타리를 뜻한다는 해석이다. ‘위례’는 사방을 널리 둘러싼다는 뜻의 위리(圍籬)와 음이 비슷하므로 목책을 세우고 흙을 쌓아 만든 담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강 옆에 쌓은 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 ‘위례’는 욱리하(郁里河), 아리수(阿利水)와 함께 한강을 가리키는 이두(夷讀)식 이름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왕이 사는 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에는 “백제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는데 중국 말로 왕(王)”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위례’는 어라와 함께 왕 내지 ‘크다’라는 뜻이며, 위례성은 왕성 혹은 큰 성[대성(大城)]이라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견해 중 가장 널리 인정되는 것은 ‘위례’가 담이나 울타리를 뜻한다는 첫 번째 해석이다.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서로 다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위례성이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조선 시대의 직산군 이동면] 지역이라고 믿었다. 천안시 입장면위례산 정상부를 감싼 위례산성(慰禮山城)이 그 흔적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인 학자들이 주로 유적·유물을 분석하는 고고학적 방법으로 위례성의 위치를 밝히려 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남한산성·풍납토성처럼 한강 유역의 규모가 큰 성에 주목했다. 광복 이후에는 처음에 하북 위례성이 북한산 기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널리 인정되었다. 1970~1980년대에는 서울특별시 송파구의 몽촌토성(夢村土城)에 비정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위례산성과 마주하여 경기도 안성시의 서운산성이 남향으로 축조되어 있어 주목된다. 일부 학자는 서운산성이 고구려 장수왕의 남쪽 끝 기지였고, 위례성은 백제 문주왕의 북쪽 끝 방어선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명칭 유래]

산의 정상부에 위례성이 있어서 위례산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위례성이란 명칭에서 ‘위례’는 우리말의 ‘울타리’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다. 위례산은 직산 위례성, 검은 산, 신산(神山)으로도 불린다.

[자연 환경]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및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성거읍’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과 천안시 동남구 북면목천읍’ 간의 접경부에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서운산[547.4m]~부수문이 고개~위례산~우물목 고개-사리목 고개~성거산[579.1m]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적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산지는 차령산맥(車嶺山眽)의 일부이며, 이 산지에 위례산이 있다.

위례산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좁게 보면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호당리동남구 북면 운용리 사이에 있지만, 정상부를 포함한 사면까지 넓게 보면 입장면 호당리·양대리북면 운용리·납안리 사이에 있다. 위례산 남서쪽의 목천읍 석천리, 성거읍 천흥리북면 납안리의 접경부에 성거산이 있고, 위례산성거산 사이에 우물목 고개사리목 고개가 있다. 위례산 북동쪽의 입장면 양대리북면 운용리 접경부에는 부수문이 고개가 있다.

위례산의 북쪽 및 서쪽 비탈은 급경사이지만 곡간(谷間)에 입장천의 상류부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 및 동쪽 바탈은 북쪽 및 서쪽 비탈보다 상대적으로 완경사이지만 곡간에 병천천의 상류부가 형성되어 있다. 위례산입장천병천천의 분수계(分水界)의 일부이다.

[현황]

위례산의 해발 고도 500여m 일대까지 마을들이 입지해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하천 상류부에 국지적으로 형성된 소규모의 범람원 충적지에서 논농사를 하거나 충적지 주변의 국지적 소규모 완사면에서 밭농사 및 과수 농사를 하고 있다.

마을로는 북쪽 비탈의 입장면 양대리 양대골·퉁점·새초골·양대 마을, 서쪽 비탈의 입장면 호당리 호계리[호견리] 마을, 남쪽 사면의 북면 운용리 삼용리[삼룡]·장생이·군단이 마을 등이 있다. 특히 북면 운용리의 마을들은 위례산이 겨울철의 차가운 북서 계절풍을 차단해 주고, 병천천의 상류부로서 수원(水源)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서 마을 입지성이 뛰어나다.

위례산 비탈의 마을들은 명칭 및 유래와 관련하여 다양한 특성을 갖고 있다. 호당리의 호계리 마을은 옛날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던 곳, 당곡 마을은 산제당이 있던 곳, 운용리 삼용리 마을은 지형이 용처럼 생긴 곳, 장생이 마을은 과거에 장(場)이 섰던 곳, 군단이 마을은 백제 때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라고 각각 전한다.

위례산 정상부에는 위례성 터가 있는데, 둘레 약 550m, 높이 약 3m의 흙으로 쌓은 산성을 비롯하여 식수로 사용한 듯한 우물인 용샘, 문 받침돌로 여겨지는 큰 돌, 평평한 대궐 터 추정지 등이 있다.

용샘용천(龍泉), 위례산성 우물[위례성 우물]로도 불렸는데, 1945년 해방 전까지도 깊이 1m, 직경 1.5m 정도의 대접처럼 생긴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용샘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 관련 전설이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우물로 들어가서 부여 백마강(白馬江)에서 놀다가 날이 밝으면 우물에서 나와서 다시 왕 노릇을 하곤 했는데, 그만 처남의 꾐에 우물에 빠져서 죽었다.”라는 것이다.

위례산 서남쪽으로 오르는 계곡은 경관이 수려하고, 산기슭에 금성사라는 사찰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주변에 독립 기념관, 유관순 열사 유적지, 천안 상록 리조트 등의 유적지 및 관광지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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