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김경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1068
한자 金景淵
이칭/별칭 성희(聖希)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종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04년 3월 26일연표보기 - 김경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67년 9월 12일연표보기 - 김경연 사망
출생지 김경연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언양(彦陽)

[정의]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성희(聖希)이다. 여진족을 정벌한 김응상(金應祥)의 6세손이고, 참봉(參奉)을 지낸 김광석(金光錫)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경연(金景淵)[1704~1767]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곁에서 모실 때는 정성을 다하였다.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고, 옷은 필히 먼저 입어보고 편한지를 살폈다.

1747년에 어머니가 역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김경연은 몸소 미음을 끓이고 약을 달였다. 밤에는 하늘에 소리쳐 기도하며 자신이 대신 앓게 해 달라고 소원하였고, 손가락을 째 피를 마시게 하면서 어머니의 목숨을 연장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초상·장례·제사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라서 정성스럽게 모셨다.

1750년에 아버지가 죽자 이전 어머니 때와 똑같이 상례를 치렀다. 슬픔과 눈물로 삼 년을 지새워 두 눈은 거의 물건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몸은 마른 나무처럼 여위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겨우 일어났다.

상례 기간이 끝나자 날마다 세수하고 사당에 배알하며 나갈 때 아뢰고 돌아와 뵙기를 부모님이 살았을 때 섬기는 것과 똑같았으며, 한 달에 세 번 성묘하며 통곡하는 일을 늙어서 쇠약해진 이후에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경연은 형제간의 우애 또한 남달랐다. 어린 나이에 한씨(韓氏) 가문의 며느리가 된 여동생이 자식도 없이 일찍 과부가 되자 죽을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으며, 함께 글을 읽고 함께 밥을 먹던 동생 김학연(金學淵)이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그리워하였다고 한다.

1767년 5월에 언양 김씨 최초의 족보인 『정해보』를 완성하였으며, 그해 김경연이 죽자 지역의 인사들이 “우리 고을의 군자가 죽었다.”라고 하면서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묘소]

천안시 목천읍 서흥리 2구 상림에 묘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실전(失傳)되어 찾을 수가 없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