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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90
한자 趙秉鎬
이칭/별칭 덕경(德卿),문헌(文獻)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7년연표보기 - 조병호(趙秉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66년 - 조병호 정시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79년 - 조병호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82년 - 조병호 도승지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83년 - 조병호 안동 부사로 민란 진압
활동 시기/일시 1886년 - 조병호 예조 판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92년 - 조병호 충청도 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조병호 의정부 의정대신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조병호(趙秉鎬)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임천(林川)
대표 관직 예조 판서|충청도 관찰사|장례원 경|의정부 의정대신

[정의]

개항기 천안 출신의 문신.

[개설]

조병호(趙秉鎬)[1847~1910]는 1883년 안동 부사로 재임 시 민란을 진압하였으며, 이듬해 외무독판이 되어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 등의 소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예조 판서, 한성부 판윤, 의정대신 등을 지냈다.

[가계]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덕경(德卿),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판을 지낸 조기진(趙基晉)의 아들이며, 한일 합방 이후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한 조경호(趙慶鎬)의 동생이다.

[활동 사항]

1866년(고종 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홍문관의 관원으로 법규 교정소 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이 되었다. 1869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에 홍문관 응교로 승진하였다. 1872년 동부승지, 1879년 성균관 대사성, 1880년 이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881년 수신사로 일본에 가서 내외 정세를 살피고 돌아왔다.

1882년 도승지에 올랐고, 도승지로 재임 중에 임오군란 후 민비의 국상 발표에 반대하였다. 그 후 이조 참판에 올랐으며, 1883년에는 안동 부사로 임명되어 동래 민란과 성주 민란의 안핵사(按覈使)를 겸임하여 민란을 진압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후 사대당 중심의 정부 조직 때에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발탁되어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의 소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등 사대당 정책 수행에 노력하였다.

그 뒤 강화부 유수를 거쳐, 1885년 공조·예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1886년 예조 판서가 되었다. 1889년 의정부 우참찬·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다음해에 다시 예조 판서를 역임한 뒤 1892년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1894년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1895년 장례원 경(掌禮院卿)·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1897년 탁지부대신과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904년 내부대신을 역임한 뒤, 1905년 황해도 감사에 발령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탁지부대신·참정대신이 되었고, 1906년 의정부 의정대신이 되었다.

그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자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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