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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붕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47
한자 李鵬海
이칭/별칭 이일영(李鎰永),이봉기(李鳳基)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5월 15일연표보기 - 이붕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붕해 천안에서 3·1 운동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이붕해 고려 혁명군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이붕해 신민부 경비대장으로 활약
활동 시기/일시 1929년 7월 - 이붕해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29년 8월 - 이붕해 재만한족총연합회 결성 및 군사위원장으로 활약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월 - 이붕해 김좌진 암살 뒤 치안대 조직하여 주범 김봉환을 체포하여 처단
활동 시기/일시 1932년 2월 - 이붕해 한족 연합회 주하 지방 집행 위원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50년 6월 28일연표보기 - 이붕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 - 이붕해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이붕해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사직동 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재만 한족 총연합회 군사 위원장|한국 독립당 중앙 감찰 위원회 사찰부장

[정의]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붕해(李鵬海)[1899~1950]는 본적이 충청남도 천안군 사직동 10번지로, 신흥 무관 학교를 7기로 졸업한 뒤 1922년 고려혁명군 조직에 참가하였다. 1925년에 신민부(新民府), 1929년 7월에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참가하였고, 같은 해 8월에는 재만 한족 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 군사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32년 2월 한족 연합회 주하(珠河) 지방 집행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일영(李鎰永), 이봉기(李鳳基)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1919년 고향인 천안에서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신흥 무관 학교를 7기로 졸업하였고,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청산리 전쟁 후 일본군의 추격을 벗어나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노령으로 넘어갔으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이 참살당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에는 고려 혁명군 조직에 참가하여 동북만(東北滿)·밀산(密山)·호림(虎林) 지방에서 항일 무장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金佐鎭)을 중심으로 신민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가하여 경비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7월에는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재만 무정부주의자 연맹과 신민부가 합작하여 재만 한족 총연합회를 결성하고 김좌진을 위원장으로 추대해 새로운 항일전을 도모하게 되자, 이붕해는 군사 위원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30년 1월 위원장 김좌진이 공산당원 김봉환(金奉煥)의 조종을 받은 박상실(朴尙實)에게 저격당해 순국하자, 군사부 위원장이던 이붕해가 중심이 되어 치안대를 조직하고 대장이 되어 주범 김봉환을 체포해 처단하는 한편, 지방의 치안 유지에 전력을 다하였다. 1932년 2월에는 한족 연합회 주하 지방 집행 위원장으로 지하 운동을 전개하여 재만 한인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광복 후에는 한국 독립당 중앙 감찰 위원회 사찰부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1949년 제주도 병사구 사령관을 역임하였고, 방위군 옹진 지단 고문관으로 활약하던 중 6·25 전쟁 중인 1950년 6월 28일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붕해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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