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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29
한자 柳禮道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8월 15일연표보기 - 유예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일 - 유예도 천안 아우내 장터 독립 만세 운동 참가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유예도 대통령 표창 추서
몰년 시기/일시 1989년 3월 25일연표보기 - 유예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유예도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유예도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유예도(柳禮道)[1896~1989]는 1919년 3월 1일 사촌동생 유관순(柳寬順)과 함께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독립 선언문 선포식에 참가한 뒤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 3월 13일에는 유관순과 함께 귀향하여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4월 1일 3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시가를 행진하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가계]

본관은 고흥(高興).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유중무(柳重武)의 맏딸이자 유관순의 사촌언니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살의 나이로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다.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독립 선언문 선포식에 사촌동생 유관순과 함께 참가한 뒤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 3월 13일에는 유관순과 함께 귀향하여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터에서 4월 1일을 기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마을 어른들과 상의하였다.

4월 1일 3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시가를 행진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선두에 섰던 큰아버지 유중권 등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아버지 유중무유관순 등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유예도는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가까스로 피신하여 두안골의 외가로 피신하였다. 수색의 손길이 외가까지 미쳐오자 외삼촌이 진천으로 피신시켰고, 다시 홍성으로 피신하여 광복의 그날까지 숨어 지냈다.

광복 후에는 농촌 계몽 지도원, 반탁 운동 지도 위원, 애국 부인회 지방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예도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1.04 [상훈과 추모] 오타 수정 유몌도 -> 유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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