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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63
한자 黃德基
이칭/별칭 경리(景履)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5년연표보기 - 황덕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01년연표보기 - 황덕기 사망
묘소|단소 황덕기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성격 효자
성별
본관 회덕(懷德)

[정의]

조선 전기 천안에 묘소를 조성한 학자·효자.

[가계]

황덕기(黃德基)[1545~1601]의 본관은 회덕(懷德), 자는 경리(景履)이고 호는 비풍(比豊)이다. 할아버지는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황우참(黃友參),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 황윤림(黃潤霖)이며, 어머니는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역임한 한호(韓瑚)의 딸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첫째 부인은 민희증(閔希曾)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고, 둘째 부인은 권핍(權愊)의 딸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활동 사항]

남구만(南九萬)황덕기의 묘갈명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황덕기는 효를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돌아가신 뒤에는 3년 시묘를 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기 전에는 한 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으며, 항상 엄숙하고 공경함을 유지하였다. 어려서 스승을 모실 때에도 아침저녁으로 진흙길과 이슬을 무릅쓰고 걸어서 5리(里) 떨어진 스승의 집을 왕래하였는데, 한 해가 다하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형제들과도 늙을 때까지 화목하고 우애하여 끝까지 순박하고 돈독함을 잃지 않았다.

젊은 시절 과거에 응했지만 질병 때문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여 읽지 않은 성현의 글이 없었으며, 읽은 뒤에는 반드시 체득하여 실천하였다. 문을 닫아걸고 단정히 앉아 독서에 매진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부모가 죽은 뒤에는 생일에 술자리를 베풀지 않았으며, 갓과 의복을 세속을 따라 꾸미지 않았다. 윤리를 후하게 하고 풍속을 돈독히 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당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한 조찬(趙璨)이 황덕기의 풍도를 흠모하여 시를 지어 주었는데, “마을 남쪽에 선사가 사네[村南善士居].”라고 하여, ‘선사’라는 칭호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호조참의를 추증받았다.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세성산(細城山)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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