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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07
한자 韓明澮
이칭/별칭 자준(子濬),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충성(忠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15년연표보기 - 한명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52년 - 한명회 문음으로 경덕궁 직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한명회 정난공신 1등·사복시 소윤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56년 - 한명회 도승지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57년 - 한명회 이조·병조 판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66년 - 한명회 영의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71년 - 한명회 영춘추관사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
몰년 시기/일시 1487년연표보기 - 한명회 사망
묘소|단소 한명회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주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 대군(首陽大君)을 보좌하여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웠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켰다.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된 이후 성종 조까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였던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훈구 대신이다.

[가계]

본관은 청주,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할아버지는 예문관 제학을 역임한 한상질(韓尙質), 아버지는 한기(韓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이적(李逖)의 딸 여주 이씨(驪州李氏)이다. 두 딸이 예종의 비 장순 왕후(章順王后)성종의 비 공혜 왕후(恭惠王后)이다.

[활동 사항]

한명회는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 직(敬德宮直)이 되었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 등 대신들이 집권하자 당시 교리이던 친구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 대군에게 접근,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하여 수양 대군의 오른팔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수양 대군의 심복 참모로 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 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다. 그해 가을 좌익공신 1등으로 책봉되고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그들의 처형에 적극적이었다. 이어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고, 1457년 이조 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병조 판서가 되었다.

1459년 황해도·평안도·함길도·강원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에 이어 1463년 좌의정,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권람·신숙주(申叔舟) 등과 인척 관계를 맺고 세조의 정국 운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1466년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꾀하였다는 혐의로 끌려가 신문을 당하였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영의정으로서 정사를 전단하였다. 같은 해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 판서를 겸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1등에 책봉된 뒤 영춘추관사로서 최항(崔恒)·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완성하였으며,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하였다.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 확충을 위하여 경사의 서적을 많이 인출하여 비치하도록 하였다.

1484년 70세로 궤장을 하사받았다. 세조 즉위 이래 성종 조까지 고관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군국대사(軍國大事)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세조는 특히 그를 총애하여 “나의 장량(張良)”이라고까지 하였다. 네 차례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봉되어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엄청난 부를 누렸다.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 묘소가 있다. 수신면 지역은 현재는 천안시 권역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청주목에 속해 있었다. 청주는 한명회의 본향이면서 농장이 있던 곳이다. 현재 묘역에는 신도비와 재실이 있으며, 청주 한씨 충성공파 묘역과 접해 있어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신도비는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사사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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