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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486
한자 倭寇-侵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350년 - 왜구가 본격적으로 출몰
성격 왜구 침입 사건

[정의]

고려 시대에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 해적 집단의 침입.

[개설]

왜구는 13~16세기에 우리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인 해적의 총칭이다. 우리나라에서 왜구의 활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가 가장 심하였고, 그 중에서도 고려 말 약 40년간은 특히 그 피해가 커서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왜구는 1350년(충정왕 2)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출몰하기 시작하였으며, 공민왕 때를 거치면서 점차 침략 횟수가 빈번해지고 그 규모도 커지고 있었다. 왜구가 가장 극성을 부린 것은 우왕 때의 일로, 내륙 지방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377년(우왕 3)에는 왜구를 피하여 내륙 지방인 철원으로 천도할 것이 논의될 정도였다.

[경과]

왜구는 2차에 걸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내란으로 몰락한 무사와 농민들이 노예와 미곡(米穀)을 약탈할 목적으로 생겨났다. 그들은 지방 호족들의 보호와 통제 아래 행동하였으며, 그 근거지는 대마도·마쓰우라[松浦]·이키[壹岐] 등으로 그 중에서도 물자가 부족한 대마도 사람들이 주동이 되었다.

고려 시대 때 왜구가 처음 침입한 것은 1223년(고종 10)이지만, 당시의 고려는 내정이 문란한데다가 홍건적의 침입 등으로 대외 관계가 복잡하여 왜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본격적인 왜구의 침입은 1350년(충정왕 20)부터이다. 이후 노략질은 더욱 심해져 공민왕 때에는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침범하였다. 또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까지 출몰하여 개경의 치안이 위험해지자 천도론(遷都論)까지 등장했다. 우왕 때는 특히 심하여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왜구의 침입을 받았다. 왜구는 조선(漕船), 조창(漕倉)을 습격하여 미곡을 약탈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노략질해 갔다.

[결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고려의 경제적 피해는 막대해 국가 재정이 파탄의 위기에 이를 지경이었다.

왜구의 소탕전으로 유명한 것은 1376년 최영(崔瑩)이 홍산(鴻山)[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에서 대승을 거둔 홍산 대첩, 1380년 왜선 500여 척이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최무선 등이 화포로 모두 불살랐던 진포 싸움이다. 또한 진포 싸움 때 상륙한 왜구가 내륙 각지를 노략하고 황산(荒山)에 이르자 이성계가 모두 섬멸한 황산 대첩과 1383년 정지(鄭地)의 남해 대첩 등이 있다.

1389년(창왕 1) 2월에는 경상도 원수 박위가 10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 정벌은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고려 또한 왜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려 시대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왜구의 침입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해안 지역이 왜구의 피해를 많이 입고 황폐화되었다. 또한 민가의 약탈과 천도론의 대두로 인해 민심이 동요되고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세를 운반하고 보관하던 조운선(漕運船)과 조창(漕倉)의 약탈로 국가 재정이 파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경제적인 피해가 막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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