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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남리 두지골 산신제와 노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2024
한자 斗南里斗芝-山神祭-路祭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두남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산제당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두남리 두지골 앞산 노적봉
성격 민간 의례|동제
의례 시기/일시 칠석[음력 7월 7일]
신당/신체 산제당|제단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두남리에서 매년 칠석날 농사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두지골에서는 해마다 칠석날[음력 7월 7일] 새벽에 마을의 안녕과 가가호호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산신제와 노제를 지냈다. 이를 위하여 예전에는 부정이 없고 깨끗한 주민 가운데 길일인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을 가려 제관을 뽑았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또한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문밖출입을 삼간 채 치성을 드리되 부인과 잠자리를 하지 않고 술과 담배, 비린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산신제와 노제의 비용은 마을의 공동 기금에서 충당했다. 제물은 쇠머리, 삼색과실, 떡, 포, 술 등인데, 술은 제주의 집에서 담근 조라술을 썼다. 마을에서는 산신이 마을의 평안을 이룰 뿐 아니라 가가호호의 액운도 막아 준다고 믿어 제물을 마련할 때는 자발적으로 나서 준비하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예전에는 한학을 배운 노인이 있어 택일과 제관 선정 등을 전담하는 등 정성껏 제를 지냈다. 그러나 옛 노인들이 타개하면서 서로 제관이 되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이에 따로 제관을 뽑지 않고 이장, 반장, 새마을 지도자 등 마을의 임원이 제주(祭主)가 되어 산신제를 지냈다. 이때부터 금줄과 황토도 없어지고 과거에 엄격했던 금기는 단지 부정을 가리는 등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마을의 오랜 전통을 없앨 수는 없으니 산신제의 명맥만 유지한 셈이다. 그러던 중 1990년대 후반에 주민들 사이에서도 산신제를 그만두자는 의견이 많아 마침내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제당은 마을 앞산 노적봉 밑에 있다. 노적봉은 산의 형상이 노적가리를 쌓아 둔 것처럼 뾰쪽하게 생겼기 때문에 유래한 지명이다. 산제당의 형태는 당집이나 신목, 별도의 신위 표시는 없었고 단지 바위 밑에 있는 제단에 제물을 차리고 제를 지냈다.

[절차]

산신제는 유교식 기제사와 동일한 절차로 진행되었다. 제관이 잔을 올리고 재배하며 축문을 읽고 나서 집집이 세대주의 소지(燒紙)[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려고 흰 종이를 사르는 일]를 올리며 무탈하기를 축원하였다. 산신제를 마치면 마을 입구에서 노제를 지냈다.

[부대 행사]

예전에는 칠석제를 마치고 마을의 좁은 골목길과 사방으로 이어진 도로, 농로 등을 닦고 깨끗이 청소했다. 아울러 이날 공동 우물도 품고 청소했다. 그리고 점심에는 주민들이 모여 함께 산신제를 지냄 음식으로 음복을 하고 하루를 즐겼다.

[현황]

두남리 두지골 산신제는 1990년대 후반에 중단되었다. 당시 마을에서 젊은이들이 죽는 등 마을에 불상사가 자주 일어났는데 일부에서는 산신제를 잘못 지냈기 때문이라 하여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마을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차라리 산신제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어 중단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칠석날 길을 닦는 전통도 없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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