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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45
한자 李柏夏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4월 17일연표보기 - 이백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일 - 이백하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85년 2월 16일연표보기 - 이백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이백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이백하 출생지 - 충남 천안군 성남면 신덕리 지도보기
활동지 아우내 장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3·1 운동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백하(李伯夏)[1899~1985]의 본적은 충청남도 천안군 성남면 신덕리로 1895년 2월 16일 출생하였다. 그 외 가계나 학력 등은 알 수 없고, 1919년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아우내 장터의 독립 만세 운동은 원래 2개의 계열로 나누어 계획되었다. 하나는 수신면(修身面)·성남면(城南面) 계통으로 수신면(修身面)의 홍일선이 발의하여 김교선·한동규·이순구, 성남면(城南面)이백하, 갈전면(葛田面)의 김상철(金相喆) 등의 20대 청년들이 중심이었다. 또 하나는 동면(東面)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계로, 조인원의 아들 조병호(趙炳鎬), 유관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숙부 유중무(柳重武), 조만형(趙萬衡), 수신면(修身面)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 갈전면(葛田面)의 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백하는 수민면·성남면 민계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처음 김교선(金敎善)과 홍일선(洪鎰善)은 갈전면[지금의 병천면(竝川面)] 아우내 장터의 장날을 이용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3월 29일경 한동규(韓東奎)와 이순구(李旬求)에게도 그들의 계획을 알리고 권유하였으며, 한동규는 다시 이백하의 찬동을 받았다. 이들은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도착해 장터로 들어오는 주민들에게 조선 독립 만세를 함께 부르도록 권유하였고, 장터를 떠나려는 주민들에게는 되돌아가서 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趙仁元)이 주도하여 사전에 계획한 대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이백하를 비롯한 군중들도 이에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누비면서 행진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에는 약 3,000여 명의 장꾼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이에 헌병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발포하고 총검으로 마구 찌르는 등의 만행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오후 4시경 사망자의 가족과 친지가 시체를 병천 헌병 주재소로 운반해 놓고 항의하였다. 이 때 이백하를 비롯한 한동규·김교선·이순구 등은 아우내 장터에서 약 100명의 집단을 지휘하여 병천 헌병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앞장서서 사무실 입구에 버티고 선 채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절규하였다. 한동규는 헌병 보조원이 소지한 태극기를 빼앗아 휘두르며 이백하와 함께 병천 헌병 주재소장에게 사망자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며 우리도 함께 죽여 달라고 말하였다. 또한 이백하는 유치장의 구금자를 모두 풀어 달라며 대들었고, 이순구는 쇠스랑을 휘둘러 유치장 벽을 때려 부수는 등 과격한 행동으로 군중의 기세를 돋우었다. 이뿐 아니라 김상철은 수차례에 걸쳐 유치장의 벽을 걷어차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돌을 던지기도 하고, 철조망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소방 기구들도 마구 흩어 놓는 등의 행위로 주재소장인 일본 헌병 오장[小山]에게 항의하였고, 일본군은 이에 대해 발포로 응수하였다.

결국 이백하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공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 받아 불복 공소하였는데, 기각되어 고등 법원에서 2년형을 확정, 옥고를 치렀다. 1985년 2월 1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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