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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05
한자 金敎善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2년 6월 6일연표보기 - 김교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일 - 김교선 아우내 장터 독립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70년 7월 25일연표보기 - 김교선 사망
출생지 김교선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발산리 97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교선 거주지 -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발산리 97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건국 훈장 애족장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교선(金敎善)[1892~1970]은 1919년 3·1 운동 당시 28세로, 천안 수신면 발산리에 거주하는 농민이었다. 홍일선(洪鎰善)·한동규·이백하·이순구 등과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활동 사항]

김교선은 홍일선(洪鎰善)과 함께 천안군 갈전면에 있는 병천 시장의 장날을 기해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3월 29일경 한동규와 이순구에게도 그들의 계획을 알리고 권유하여, 4월 1일에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는 홍일선과 함께 아우내 장터[병천 시장]에 도착해 이미 약속한 대로 아우내 장터의 출입구를 지켰다. 그리고 장터로 들어오는 주민들에게 조선 독립 만세를 함께 부르도록 권유하였고, 장터를 떠나려는 주민들에게는 되돌아가서 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趙仁元)이 주도하여 사전에 계획한 대로 군중들을 모아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자 김교선을 비롯한 군중들도 이에 합세하여 그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에는 약 3,000여 명의 장꾼이 모여 대대적인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고 전한다.

이때 경계 임무 중이었던 헌병이 이들을 제지하였고, 맞서 싸우던 주민에게 헌병이 발포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안에서 헌병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총을 쏘고 총검으로 마구 찔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오후 4시경 사망자의 가족과 친지가 시체를 병천 헌병 주재소로 운반해 놓고 항의하고 있을 무렵 김교선을 비롯한 한동규·이백하·이순구 등이 약 100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도착하였다. 김교선은 이곳에서 앞장서서 사무실 입구에 버티고 선 채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특히 한동규는 헌병 보조원이 소지한 태극기를 빼앗아 휘두르며 사망자에 대한 조치 및 유치장의 구금자를 모두 풀어 달라며 이백하와 함께 주재소장에게 대들었다. 이순구는 쇠스랑을 휘둘러 유치장 벽을 때려 부수는 등 과격한 행동으로 군중의 기세를 돋우었다. 김상철은 수차례에 걸쳐 유치장의 벽을 걷어차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마을 주민들은 돌을 던지고 철조망을 파괴하였으며, 소방 기구들도 마구 흩어 놓는 등의 행위로 주재소장인 일본 헌병 소산(小山)에게 항의하였으나 일본군은 발포로 응수하였다. 그 후 군중들은 부근의 산과 시장에 모여 천안과 병천 간의 전선을 절단하고 면사무소와 우편소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결국 김교선은 일경에게 체포되어 5월 21일 공주 지방 법원에서 2년형의 언도를 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복심 법원에서 형량 변동 없이 판결을 받고 다시 상고하였다. 그러나 9월 11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되어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70년 7월 2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교선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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