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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721
한자 天安鄕校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유량동 190-2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56년 - 천안향교 명륜당 상량
개축|증축 시기/일시 1820년 - 천안향교 명륜당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899년 - 천안향교 풍화루문 중수
훼철|철거 시기/일시 1941년 - 천안향교 동재 도궤
개축|증축 시기/일시 1958년 - 천안향교 전반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7년 - 천안향교 전반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4년 - 천안향교 전반 중수 및 보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6년 - 천안향교 명륜당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3년 - 천안향교 동재 복원
문화재 지정 일시 1997년 12월 23일연표보기 - 천안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천안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현 소재지 천안향교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유량동 190-2 지도보기
성격 향교
소유자 향교 재단
관리자 천안향교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유량동에 있는 조선 시대 향교.

[개설]

천안향교(天安 鄕校)는 조선 시대에 충청남도 천안군 지역의 지방 교육을 담당한 국립 교육 기관이었다. 창건된 시기는 문헌으로 확인되지는 않으며, 다만 조선 건국 후 1413년(태종 13) 천안부영산군(寧山郡)으로 고치고, 1416년 다시 천안군으로 고치던 무렵에는 향교가 있었을 것이다. 천안향교는 한 번도 이전하지 않았고,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에 소실되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천안향교를 고증할 만한 기록이 많지 않아 1656년(효종 7)의 명륜당 상량문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향교에 소장된 『청금록(靑衿錄)』과 『재임안(齋任案)』, 『선생안(先生案)』 및 1800년대 이후의 현판 20여 점이 전하며 천안의 지리지인 『영성지(寧城誌)』[1863년 간행]에는 조선 말기 천안향교의 현황이 나타난다. 여러 자료를 통해 조선 말기의 천안향교는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고 강학하는 데 필요한 비용도 부족할 만큼 운영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국 대부분의 향교가 겪고 있던 상황이었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태조산의 남쪽 산부리인 천안시 유량동 향교말에 정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변천]

천안향교의 창건 연대를 천안향교 측에서는 조선 태조 7년인 서기 1398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문헌 자료를 통해서 확인되지는 않는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조선 초기 『경재집(敬齋集)』에 하연(河演)[1376~1453]이 쓴 7언시이다. 하연은 천안에 유배되었는데 1428년(세종 10)에 향교의 ‘신루(新樓)’에 올라 흥학(興學)의 의미를 시로 읊었다. 신루라는 것은 새로 만든 누각(樓閣)이었을 것이다. 누각을 지었다는 것은 대성전은 이미 완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천안향교는 창건된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이전하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천안군 학교 조와 1863년(철종 14)에 간행된 『영성지』의 학교 조에 모두 향교의 위치가 고을 동쪽 6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위치와 일치하고 있다. 다만 『충청도 읍지』에 문묘가 군의 동쪽 7리[2.7491㎞]에 있다는 기록은 착오이거나 거리 계산의 차이로 보인다. 향교의 입구 동쪽에 있는 500년 수령의 탱자나무도 향교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천안향교의 연혁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다. 천안향교 측에서는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으로 향교 건물이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을 증명할 만한 사료는 없다. 정유재란 중에 가까운 직산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므로 천안에서도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986년에 천안향교를 중수하면서 발견한 명륜당 상량문은 명륜당이 1656년(효종 7) 4월 18일에 상량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상량 당시의 천안 군수는 성급(成岌)이었고, 유사(有司)는 현언(玄偃)·이억(李檍)·원변(元籩)·이훈(李勛)·진사 임득인(林得仁)·유동원(柳東元)·김○맹(金○孟)·유동엽(柳東曄)이었으며, 색리(色吏)는 한경승(韓敬承)·주석용(周碩龍)이었다. 또한 목수는 마곡사 승려 해등(海登)과 광덕사 승려 의신(義信)이었고, 성전을 단청한 수리(首吏)는 신의붕(申義鵬)이고, 화원은 청용사 승려 천욱(天旭)이었다. 성전의 향배는 축좌미향(丑坐未向)이었던 것을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고치고 있다.

천안향교 명륜당에는 중수와 관련된 현판이 걸려 있지만 대개 1800년대 이후의 기록이다. 「명륜당 중수기」에 의하면 1819년(순조 19)에 심노숭(沈魯崇)이 천안 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천안향교는 건물이 퇴락하여 향음 주례도 제대로 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상사[도유사] 채홍일[재임안에 의하면 채홍일은 1820년의 도유사였다.]의 요청으로 명륜당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군의 섬고전 100량에 육영재 60여 금을 보충하여 1820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공사가 이루어지는데, 중수기에서는 박시복(朴時復)[장의]과 이복영(李復永)[색장]의 노고가 컸다고 밝히고 있다. 「명륜당 중수기」는 김만종이 썼는데, 김만종은 1821년의 도유사였다.

『영성지』에는 당시 천안향교의 현황이 상세하다.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동·서무, 동·서 재실, 전사고(典祀庫), 내신문(內神門), 외삼문 겸 풍화루(外三門兼風化樓)가 있었고, 토지는 사패지로 원교둔(原校屯) 12결, 추교둔(追校屯) 7결에, 교복(校復)은 7결이었다. 교생(校生)은 50명이었고 액외(額外) 교생은 20명이었으며, 교보(校保) 200명에 수복(守僕) 1인이 속해 있었다.

한편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천안향교에서는 재정이 곤궁하여 강회(講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섬학전이 마련되고 있는데, 기금은 1884년(고종 21)에 부임한 충청도 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이 여러 고을의 향교에 분봉하면서 천안향교에 내려준 500량과 천안 군수 이시우(李時宇)가 출연한 200량을 바탕으로 하여 여기에서 자모지리를 취하여 고을의 유생들이 회강하는 비용을 삼도록 하고 있다. 당시 도유사는 이사흠(李思欽)이었고, 장의는 유현상(兪鉉庠)·채동희(蔡東禧), 색장은 홍필유(洪弼裕)·이교희(李喬凞)였으며, 「교궁섬학기」의 기문은 1886년(고종 23)에 이석원(李錫源)에 의해 작성되었다.

또한 1890년에는 장의 박제면(朴齊冕)의 주도로 천안향교의 운영이 쇄신되었다. 원래 천안향교에서는 석전 제향 시 계방촌을 통해 포우(脯牛)와 비우(備牛)가 행해졌지만, 이때 송산포 우소(松山脯牛所)는 순영으로 들어갔고, 추향에 소를 잡던 것도 폐지된 듯하다. 그런데 당시 1장의였던 박제면이 주도하여 관찰사 이헌직(李憲稙)으로 하여금 송산포우소를 도로 천안향교에 소속시키도록 하였으며, 군수 이승기(李承紀)로 하여금 제향에 소를 준비하고 푸줏간을 부토리(富土里)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박제면은 논을 향교에 기부하고 홍살문을 고치고, 매몰되었던 하마비를 찾아서 세웠으며, 임안(任案) 교자(轎子) 홍보(紅褓) 배석(拜席) 등을 수즙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이희(李熺)가 1890년에 작성한 「교궁복구례기」라는 기문에 밝혀져 있다.

1899년에 박제면[당시 도유사]이 기록한 「풍화루문 중수기」에 의하면 19세기 후반기의 천안향교의 상황이 나타난다. 우선 1868년에 수리한 뒤 30여 년이 지나면서 심하게 퇴락하였는데, 1898년에 충청도 어사 박영민(朴永民)과 천안 부사군 조응현(趙應顯)이 300금을 출연하여 수즙을 돕도록 하므로 향교 전체의 모습이 예전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다. 이때 전부터 있던 풍화루[천안향교의 외삼문루]도 일신하여 ‘정화(正化)’라고 편액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99년 여름에 정화루가 전복되어 파쇄되었다. 그리하여 고을에서는 민으로부터 추렴하여 루를 다시 지으려고 하였는데 당시 천안 군수였던 이상희(李象羲)가 재물을 거두지 말고 문을 세우는 것이 낫다고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군에서 200금을 내고 학재 약간을 보충하여 박영민과 조응현의 송덕비를 세우고 나머지 재산을 향장(鄕長) 오영렬(吳永烈)이 도와준 100금과 합하여 누문을 건립하게 되었다.

「교궁섬학기」에 의하면 전어사 박영민이 엽전 200량을 출연하여 50량은 학교에 주고 150량은 각면 훈장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조응현이 또 150량을 출연하여 각 면에 나누어 주고 강학을 도와 춘추 강회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천안향교에서는 가끔 모여 월과를 하였으나 아직 고규의 복구를 다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한편 천안군의 고우전(雇牛錢)은 이중하(李重夏)가 암행어사가 행차했을 때에 진상하여 민폐를 구하도록 했는데, 근자에 진상을 혁파한 후 누누이 학교에 주라고 말했으나 이루어지지 않다가 천안 군수 남만리(南萬里)가 고우전 가운데 400량을 특별히 학교에 주어 면학을 권장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해마다 춘추로 학교에 모이기를 마치면 먼저 6경의 글을 읽고 향음례를 행하게 되었다고 한다[1902년 정월 1장의 김홍제 기록, 도유사 이종직].

이후 일제 강점기 때의 천안향교 상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1950년대 천안향교는 대성전과 삼문이 새고 명륜당, 계단, 마당, 담장 등이 도괴되어 갔다. 그리하여 1957년 추향 대제 때 수리하기로 결의하여 찬조금을 거두어 1958년까지 중수하였다. 그 후에도 1967년과 1974년에 교궁 전반에 걸쳐 중수 및 보수를 실시하였고, 1986년에는 명륜당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1941년에 도궤된 동재도 1993년 11월에 복원되었다.

[형태]

천안향교는 구릉 중턱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정면에 길게 진입로가 나 있다. 향교 입구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여기에서 직선으로 외삼문이 있으며 외삼문을 들어서면 작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후면에 명륜당, 동측에 동재, 서측에 서재가 서로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명륜당 뒤를 돌아가면 한 단 높은 대지를 만들고 내삼문간을 길게 배치해 두었다. 그리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 동무, 서무가 중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다른 향교에서는 지형에 따라 자연스럽게 담을 만드는데 비해 천안향교에서는 전후좌우 담이 직선이 되도록 만들어 강학 공간과 묘당 공간의 대칭적으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엄격한 분위기를 표출하게 되고 향교의 엄숙함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내삼문으로 사용하는 문간인데, 9칸 길이의 문간이 두 공간을 완벽하게 분리하고 있다.

[현황]

광복 이후 향교는 더 이상 교학 기능은 회복하지 못한 채 춘추의 석전제와 삭망의 제향만 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향교의 공간을 교육과 문화 공간으로 적극 활용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이 실현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 천안향교 활동을 홍보하는 카페[http://cafe.daum.net/cunanhiangko]가 개설되었고, 2010년 12월 22일에 천안 교육 지원청천안향교는 MOU 협약을 체결하였다. 협약에 따라 교육청은 초·중학교에 천안향교의 지원 활동을 안내하고 천안향교는 충효 교실 운영으로 예절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충남 향교 재단에서는 2011년부터 천안향교 주변 정비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천안향교는 조선 시대 천안군에 건립된 관학 교육 시설로 천안 지역의 공교육을 주도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향교는 피해를 입어 1600년대에 건물을 중수하였으나, 교육 기능은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였다. 1800년대에 들어서는 관학의 부흥을 위하여 관찰사와 군수가 자금을 동원하고, 향교 역시 운영비용을 마련할 목적으로 기존에 제물용 소를 잡던 관례가 폐지되었던 것을 다시 살리는 등 여러 모로 노력을 기울였던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향교의 연혁을 보여 주는 자료는 많지 않지만 조선 후기 천안의 지리지인 『영성지』에는 1800년대 후반 천안향교의 규모와 경제적 상황이 비교적 상세한 편이다. 또한 명륜당 등에 걸려 있는 현판을 통하여 조선 말기 관학의 역할이 축소된 상황에서 향교가 운영자금을 어떤 식으로 조달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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