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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 침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483
한자 契丹軍侵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문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993년연표보기 - 거란군 1차 침입
전개 시기/일시 1010년연표보기 - 거란군 2차 침입
전개 시기/일시 1018년연표보기 - 거란군 3차 침입
종결 시기/일시 1019년 - 거란군 침입 물리침
성격 거란군 침입 사건

[정의]

고려 시대 거란족의 침입으로 왕이 천안부를 거쳐 남쪽으로 피난한 사건.

[개설]

거란족은 몽고족의 일파로 요하(遼河) 상류 유역을 중심으로 916년에 흥기(興起)하고, 980년에 먼저 정안국(定安國)을 정복했다. 거란은 중국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고려와는 친선 관계를 맺어 후환을 없애려 하였다. 이에 거란은 942년(태조 25)에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바치면서 교섭을 벌여왔다. 하지만 태조는 “거란은 발해와의 구맹(舊盟)을 저버리고 하루아침에 발해를 쳐서 멸망시킨 무도(無道)한 나라이므로 교류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사신 30인은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굶어 죽게 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 정책을 강행하여 청천강까지 국경을 확장시켰다. 여기에 중원에서 송(宋)이 건국되자 고려는 일방적인 친송(親宋) 정책을 썼으므로 거란과는 더욱 대립을 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거란은 991년(성종 10) 압록강 하류에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여진족 및 송과의 교통을 끊더니, 993년(성종 12)에는 소손녕(蕭遜寧)으로 하여금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제1차 고려 침입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청천강에서 거란군의 침략을 저지했다. 또한 서희(徐熙)의 외교 활동으로 소손녕의 군대를 스스로 물러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란의 승인 하에 압록강까지 영토화 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그 당시 거란은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라는 서희의 주장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한편 송과의 대립으로 고려에만 전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의 땅을 차지해 통로가 열리게 되면 거란과 통교하겠다는 고려의 약속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서희의 외교적 성공은 이러한 국제 정세와 고려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정당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거란군이 퇴각한 후 고려는 압록강 남쪽의 땅에 새로 많은 성(城)을 쌓게 되었는데, 흥화진[의주]·용주[용천]·통주[선주]·철주[철산]·귀주[귀성]·곽주[곽산] 등 이른바 ‘강동 6주(江東六州)’가 그것이다.

[경과]

거란은 압록강 동쪽에 대한 고려의 지배에 불만을 표시하고,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거절하였다. 이에 거란은 강조(康兆)목종(穆宗)을 폐하고 김치양(金致陽) 일당을 멸한 뒤, 현종(顯宗)을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킨 것을 트집 잡아 1010년(현종 원년) 성종(聖宗) 자신이 40만의 군대를 이끌고 제2차로 침입해 왔다. 이때 강조는 적을 지나치게 경시한 나머지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거란군은 1011년에 개경을 점령하고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왕을 따르는 신하와 군사는 많지 않았고, 그나마 도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다. 왕이 개경에서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니 왕을 호종하고 있던 유종김응인(金應仁) 등이 현종에게 “신들이 먼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음식을 준비하여 영접하겠습니다.” 하고 아뢰고는 도망하였다. 왕이 공주(公州)에 머무니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예를 갖추어 교외에 나와 영접하면서 “성상께서 산과 물을 지나시고 서리와 눈을 무릅쓰시며 이렇게 지극한 상황에 이르실 줄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하고 아뢰고, 이어 의대(衣帶)와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서 옷을 갈아입고, 토산물은 호종하는 신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은 나주까지 피난했다가 거란군이 물러간 뒤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에 대해 현종의 입조(入朝)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소규모 침입을 하더니 1018년(현종 9) 제3차로 고려를 침략했다.

[결과]

3차 침입에서 소배압(蕭排押)이 거느린 10만의 거란군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퇴각하였고, 1019년에 강감찬(姜邯贊)·강민첨(姜民瞻) 등이 귀주(龜州)에서 크게 격파하여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하였다. 이 싸움이 귀주대첩이며, 거란의 침입군 10만 중에 살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다 한다.

[의의와 평가]

거란의 고려에 대한 침략은 실패했고, 또 고려가 배후에 있는 한 송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게 되어 자연히 고려·송·거란[요] 3국이 대등하게 정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거란의 침입 기간 중 천안은 개경의 이남에 속하여 거란군과의 교전장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2차 침입시 현종이 나주로 피난할 때 천안을 거쳐감으로써 당시에도 교통의 요로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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