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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단적 침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482
한자 哈丹賊侵入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90년 1월연표보기 - 합단적 침입
종결 시기/일시 1291년 - 합단적 침입 평정
성격 합단적 침입 사건

[정의]

고려 충렬왕 때에 원(元)나라의 반란군인 합단(哈丹)의 무리가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가 속했던 고려를 침입한 사건.

[개설]

1287년(충렬왕 13) 원(元)의 세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내안(乃顔)의 잔당인 합단(哈丹)이 1290년(충렬왕 16) 1월 무리를 이끌고 고려의 동북면으로 침입하였다.

[역사적 배경]

장군 오인영(吳仁永) 등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내안의 잔당 합단적(哈丹賊)이 장차 우리나라 변방을 침범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첨의찬성사 홍자번(洪子藩)과 판밀직사 정가신(鄭可臣) 등은 병부에서 군사를 선발하게 하고, 안전(安戩)을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로, 김지숙(金之淑)을 전라도 도지휘사로, 송분(宋玢)을 충청도 도지휘사로 삼는 등 대비책을 마련했다.

1290년(충렬왕 16) 1월에 만주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배한 합단적이 무리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고려 동북변에 침입하였다.

이에 1290년 2월에 금기산(禁忌山) 골짜기에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 이천현(伊川縣) 지경에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 쌍성에 한희유(韓希愈), 환가현(豢猳縣) 지경에 우군만호(右軍萬戶) 김흔(金忻), 통천(通川) 지경에 나유(羅裕)를 보내 주둔하게 하여 합단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경과]

고려의 동북변에 이르렀던 합단적이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는 쌍성을 함락하고, 다시 고려의 등주(登州)[지금의 함경남도 안변]를 함락하자 충렬왕은 강화로 피난하였다. 이듬해 합단적은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지금의 강원도]에 들어와 양근(楊根)[지금의 경기도 양평]을 점령하고, 원주의 치악성(雉嶽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원주별초(原州別抄) 소속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冲甲) 등이 힘껏 싸워 적을 물리쳤다. 원주에서 패배한 합단적은 주력을 충주로 돌리고, 일부는 개성 부근에까지 출몰하였다. 충주산성을 공격했으나, 손해를 입고 다시 남하해 연기현에 집결하였다.

이때 목주(木州)[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에 집결했던 원나라의 군대와 고려의 삼군(三軍)이 밤에 출발해 새벽에 연기의 정좌산(正左山)에 이르러 불시에 합단적을 쳤다. 합단적은 놀라 말을 버리고 숲속으로 숨었다.

고려의 선봉대는 김흔의 지휘 아래 앞을 다투어 올라가며 결사적으로 싸웠는데, 이때 이석(李碩)·전득현(田得賢) 등이 적의 선봉을 무찔렀다. 계속해서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공격하자 합단적은 대항할 수 없어 달아났다. 연합군은 이들을 맹렬히 추격해 공주강(公州江)에 이르렀는데, 이때 ‘적의 시체는 30여 리에 걸쳤고, 익사자도 매우 많았으며, 적은 부녀·의복·안마(鞍馬)·보기(寶器) 등을 버리고 강을 건너 달아났다.’고 전해진다.

[결과]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에 크게 패한 후 합단적의 정예 기병 부대는 진용을 재정비해 연기 북쪽에서 크게 떨쳐 일어났으나, 고려 장수 한희유의 추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고 합단합단의 아들 노적(老的) 부자는 2천여 기(騎)를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합단적의 후속 부대 3천여 기가 철령을 넘어 교주(交州)[지금의 강원도 회양]까지 들어왔으나, 본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다시 철령을 넘어 달아났다. 그리하여 합단적의 침입은 1년 6개월 만에 평정되고, 충렬왕도 강화에서 환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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