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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굴평 유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2207
한자 金掘坪由來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판정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동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8년 6월 30일 - 『천안의 민담과 설화』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8년 12월 31일 - 『천안의 민담』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0년 2월 - 『한국 지명 유래집』-충청편에 수록
관련 지명 「금굴평 유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판정리 지도보기
성격 전설|지명 유래담
주요 등장 인물 충렬왕|몽골 관리|일본인|고을 백성들
모티프 유형 외세의 핍박에도 금광을 지킨 고을 사람들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에서 전해 내려오는 금굴평에 관한 지명 유래담.

[개설]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의 왕주봉 일대는 예부터 금이 나는 산지로 이름이 나 있었다. 직산 금광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제28권 충렬왕(忠烈王) 2·3년 조에 나타나는데, 원나라에서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금을 채취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금굴평 유래」는 이러한 역사적 기록에 바탕을 두고 생겨난 지명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금굴평 유래」는 민병달·이원표 등이 조사하여 1998년 천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천안의 민담과 설화』와 국토 해양부 국토 지리 정보원에서 2010년에 발간한 『한국 지명 유래집』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구(舊)직산 왕주봉 부근의 들판은 ‘금을 캔 들판’이라는 뜻으로 금굴평이라고 불러왔다. 직산 고을은 예부터 금이 나는 산지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충렬왕 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는데, 금을 조공으로 바치라는 원나라의 요구를 고려가 계속 기피하자 원나라에서 채금관(採金官)을 직접 파견하였다. 이때 채금관이 직산에 내려와 직접 사금(砂金)을 채취하였다.

사금 채취는 원래 표토(表土)를 제거하고 모래층에서 금을 가려내는 작업인데, 채취 작업에 동원된 직산 고을 백성들이 고의적으로 금을 묻어 버렸다. 그래서 원나라의 채금관이 직산에서 약 3년에 걸쳐 100개소 정도의 시굴 작업을 벌였으나 겨우 서너 근의 사금만을 채취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직산 일대의 사금을 모조리 채취하여 갔다. 조상들이 어렵게 지켜 온 사금을 후손들은 일본에 강탈당한 셈이다.

[모티프 분석]

「금굴평 유래」는 고려 후기 당시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원나라의 핍박에 굴하지 않고 금광을 꿋꿋이 지켜낸 직산 고을 백성들의 애국심이 잘 나타난 지명 유래담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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