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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1017
한자 忠臣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집필자 김선명

[정의]

전통 시대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을 실천한 천안 출신의 인물.

[개설]

충신은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절을 다한 신하로서, 성신(聖臣)·양신(良臣)·충신(忠臣)·지신(智臣)·정신(貞臣)·직신(直臣) 등 육정신(六正臣) 중의 하나이다. 천안 지역에도 충과 관련된 인물이 많이 있어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던 충 사상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천안 지역의 효자에 관한 기록은 『대록지(大麓誌)』, 『직산현지(稷山縣誌)』, 『영성지(寧城誌)』, 『대록삼강실록(大麓三綱實錄)』, 『여지도서(輿地圖書)』, 『조선환여승람(朝鮮環輿勝覽)』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충신]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충신으로는 심나(沈那)심소나(沈素那) 부자를 들 수 있다. 신라와 백제의 접경 지역인 직산에 살던 심나 부자는 일개 군관임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위한 충성과 용맹으로 『삼국사기』「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상국진(尙國珍)과 마륙황(馬陸況)은 백제에 대한 충성으로 목천 지역에서 백제 부흥을 꾀했던 인물이다.

[고려 시대의 충신]

우학유(于學儒)[?~1179]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관 벼슬을 하였으며, 고려 의종 때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정변에 참여하지 않고 의종명종을 숙위하는 데 온힘을 다하였다.

[조선 전기의 충신]

조명(趙銘)[?~1478]은 목천 지역에 우거하면서 계유정난 때 폐위된 단종을 향해 매일 배례를 드리다가 쇠약해져서 요절하였다.

김응상(金應祥)[?~1583]은 여진족이 발호하자 절제사를 제수받고 철령 이북 국경지대에 자주 출몰하는 여진족의 침략을 막다가 적의 화살을 맞고 절명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의 충신]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진주 목사로 있을 때 왜군이 2만여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마에 적탄을 맞아 며칠 뒤에 전사하였다.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봉되었으며, 숙종 때에는 영의정·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에 도 지정 기념물 제166호인 김시민 장군 유허지가 있다.

황세득(黃世得)[1537~1598]은 임진왜란이순신의 막료로서 사량진 첨사로 있으면서 왜군을 방어하였다. 1598년 10월 2일에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도독 진린(陳璘)과 더불어 순천 왜성에서 왜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유의신(柳義臣)[1550~1592]은 무과에 급제하여 이진 권관(梨津權官)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억기 함대의 휘하가 되어 가덕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한산도 대첩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선무 원종 1등 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봉되고 호조 참의의 증직을 받았다.

김원개(金元凱)[1551~1595]는 무과에 급제한 뒤 만호(萬戶)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직산 인근에서 왜적과 싸우고자 하였으나 휘하에 군사가 없었다.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적의 목을 벤 수가 수십 명이었다. 한성 판윤에 추증되고, 선무 원종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 김구연(金九淵)[1582~1634] 또한 열한 살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분전하여 왜군을 격파한 공으로 통덕랑 첨정(僉正)에 제수되고 선무 원종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덕회(李德恢)[?~1597]는 임진왜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1597년 남원 판관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전하였으나 대병력의 왜군에게 패해 전사하였다.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조영규(趙英圭)[1535~1592]는 무과에 급제란 뒤 양산 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동래성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69년(현종 16)에 정려를 받았다.

김계종(金繼宗)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의주로 몽진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백의 호종하였다. 후에 안악 군수를 지냈으며, 사후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조선 후기의 충신]

황박(黃珀)[?~1637]은 임진왜란 때 순천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황세득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호서 지방의 정세규(鄭世䂓)가 이끄는 근왕병(勤王兵)에 소속되어 용인에서 분전하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숙종황세득, 황박 부자를 기리는 정문이 세워졌고, 공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마정리에 부자의 정려각이 있다.

윤이관(尹以寬)·윤이오(尹以五)·윤이천(尹以天)·윤병(尹柄)·윤거(尹椐)·윤두(尹枓)·이명달(李命達)·이기현(李箕賢)·김동래(金東來)·이진하(李振夏)·이약제(李若濟)·최창조(崔昌祚)·김태두(金泰斗)·이시봉(李蓍鳳)·이약유(李若裕)·이광하(李光夏)의 16명은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당시 청주를 거점으로 한 안후기의 반군을 물리쳤다. 안후기의 반군이 진천에서 직산, 성환, 평택 방면으로 향하면서 목천현을 공격하기 위해 동면을 지날 때 이에 맞서 격전을 벌여 반군을 물리쳤다. 이들은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천안시 동남구 동면 화계리에 ‘목천 16의사 충의비(木川十六義士忠義碑)’가 있다.

이경직(李耕稙)[1841~1895]은 1885년 과거에 급제하고 을미사변 당시 궁내부 대신을 맡고 있었다.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지시 아래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 공사관원, 영사 경찰, 낭인배 등에게 항거하다가 목이 잘리어 죽음을 당했다. 1897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추증되고, 1899년에는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관련 유적]

풍세면 가송리에는 장핵(張翮)이 포함된 안동 장씨의 정려, 직산면 마정리 2구에는 황세득·황박 부자의 정려, 광덕면 매당리에는 충신 유의신이 포함된 유씨 정려, 병천면 도원리에는 충신 김철명의 정려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천안 지역의 충신은 삼국 시대의 심나·심소나 부자부터 을미사변에 항거한 이경직에 이르기까지 많은 충신을 배출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에는 김시민, 황세득 등 많은 천안 출신 충신이 활약하였다. 이에 국가에서도 관직을 증직하고 정려를 세워 표창하는 등 후세에 널리 알려 백성의 표상으로 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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