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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98
한자 豪族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경수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천안 지역의 세력.

[개설]

호족이란 원래 중국의 남쪽에서 산출되는 털이 곧고 질 좋은 짐승을 뜻하는 호(豪)와 친족집단을 뜻하는 족(族)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다. 따라서 호족은 지방에 있는 뛰어나고 우수한 친족 집단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호족의 기원은 신라 말 지방으로 낙향한 진골 귀족이나 6두품 계층, 주(州)·군(郡)의 이직자(吏職者)들, 그리고 촌의 행정을 담당한 촌주들이라 할 수 있다. 전자의 두 부류는 성주·장군을 칭하는 대호족이 되었고, 후자는 대감·제감을 칭하는 소호족이 되었다. 이들은 신라 말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해 고려 왕조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고려 왕조 성립 후 호족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하나는 중앙으로 진출해 문벌 귀족화하게 되는 부류이다. 다른 하나는 지방에 남아 왕권 강화와 더불어 향리화(鄕吏化)의 길을 걷게 되는 부류이다.

[변천]

고려 건국 이전 천안은 대록군과 백성군의 영현으로서 그 위상이 미미했다. 천안을 요충지로 여겨 부를 설치한 것은 태조 왕건대이다. 왕건은 천안의 지리적 위치를 ‘오룡쟁주지세’로 높이 평가하여 건국 직후 천안을 도독부로 지정하여 군사와 행정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런데, 신라말 고려초 천안부에는 강대한 토착 세력의 존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군사적 거점이자 지리적 요충지이면서도 강력한 토착 세력[호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천안의 또 다른 지역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태조 왕건은 자신의 후손을 천안과 연계시킴으로써 천안 지역을 왕실의 향리(鄕里) 지역으로 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태조의 제11비인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의 사례가 입증한다. 일반적으로 태조 부인들의 시호는 출신 지역명을 붙이고 있다. 따라서 천안부원부인 역시 천안 출신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천안부원부인은 그렇지 않다. 천안부원부인의 아버지 임언은 본래 경주 출신으로 927년(태조 10) 강주[경상남도 진주] 장군 왕봉규(王逢規)의 사신으로 후당(後唐)에 파견된 바 있으며, 다시 그해 말 태조의 사신으로 후당에 파견되었다. 즉 임언은 강주 호족 세력이었다가 태조에게 귀순한 것이다. 이후 임언은 천안에 내려가 천안부 도독부사인 제공을 보필하면서 천안에 연고를 갖게 되었다. 태조는 고려의 통일에 기여한 임언에게 포상을 해 줌과 동시에 임언의 딸이 낳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군사적·지리적 요충지인 천안을 향리 지역으로 삼도록 하여, 특별한 토착 세력이 없는 천안을 왕실의 주요 지역으로 포섭하려고 하였음을 짐작할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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