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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 시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498
한자 石器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선사/석기
집필자 강종원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석기를 도구로 사용하던 시기.

[개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는 전기·중기·후기로 구분되고 있는데, 전기는 12만~10만 년 전, 중기는 10만 년 전에서 3만 5000년 전까지, 후기는 그 이후부터 1만 2000년 전까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중기를 25만 년 전까지 소급시켜 보는 견해도 있다.

구석기 유적은 동굴을 비롯하여 바위 그늘이나 평지 등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대개 햇빛이 잘 비치고 강이나 물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 협동이 필요하였으므로 일정 규모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인들은 주로 나무 열매나 뿌리 등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잡아서 먹고 살았으며, 돌을 깨뜨려 만든 도구 또는 동물의 뼈나 뿔을 다듬어서 만든 골각기 등을 사용하였다. 이들 도구의 종류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데 사냥 도구로는 주먹 도끼, 찍개, 찌르개 등이 있고, 요리 도구로는 긁개, 밀개가 있으며, 공구로는 새기개 등이 있다. 특히 충북 단양의 수양개 유적에서는 이러한 석기를 만들던 석기 제작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금강 유역 구석기 문화가 전기까지 소급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조치원 일원에서도 구석기 전기부터 구석기인들의 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5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 약 4,000년간 지속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 부산 동삼동 유적으로 기원전 5000년이다. 그 하한은 경기도 시도 유적이 기원전 100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는 다시 전기·중기·후기의 3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기원전 5000년부터 기원전 3500년으로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인 빗살무늬 토기가 사용되기 이전의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주로 해안이나 강가의 사질토층을 50~100㎝ 이상 파서 만든 수혈 주거에서 생활하였다. 형태는 방형 또는 원형으로, 면적은 20~30㎡이며, 화덕이 1~2개 설치되어 있다. 유물로는 작살과 낚시 바늘, 어망추 등이 다수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로 어로 생활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기후가 계절적인 변화로 식량 자원을 얻는 데 영향을 많이 끼치는데, 강이나 바다에서는 지속적으로 식량 자원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아직은 수렵과 채집도 여전히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었으며, 특히 먼 거리까지 날아가는 화살의 사용은 수렵 기술의 발전과 함께 식량 확보의 증대를 가져왔다.

중기는 기원전 3500년부터 기원전 2000년경으로 전형적인 빗살무늬 토기가 성행되는 시기이다. 이때의 생활은 전기와 마찬가지로 수혈 주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생활 도구나 생활 경제 면에서 전기와 큰 차이가 없다.

후기는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 약 1000년간으로 빗살무늬 토기가 퇴화되어 변형되는 시기이다. 후기에는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농경이 시작되었다. 지탑리 유적에서는 피·조 등이 농경 도구와 같이 발견되었으며, 궁산리 유적에서는 돌가래·뿔가래가 출토되고, 동물의 이빨로 만든 낫 등의 농경 도구가 출토되어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점차 농경을 중심으로 한 생산 경제로 옮겨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어로·수렵에 의한 생활이 이루어졌다. 신석기 유적에서 사슴·노루·멧돼지 등의 뼈가 출토되고, 도토리 알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야생의 과일을 채집해 먹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함께 발견된 갈판은 도토리 알이나 짐승의 고기 같은 것을 연하게 갈아 먹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는 일정한 장소에서 여러 개가 함께 발견되고 있어 신석기인들이 일정한 규모의 취락을 이루고 정착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중요한 일은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처리하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것이며, 어로·수렵·농경 등의 생산 활동도 공동으로 행하였다. 그렇지만 혼인은 다른 씨족과 이루어졌으며, 또한 씨족 간의 교역도 행해졌다. 또한 우주 만물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애니미즘이나 무격신앙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미술은 대체로 추상적이면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황과 유적]

천안 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두정동 유적, 용곡동 유적, 청당동 유적, 신방동 유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두정동 유적에서 중기 구석기에서 후기 구석기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석영제의 긁개, 밀개, 망치 돌, 다면 석기 등이다. 이외는 유물은 모두 후기 구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신석기 시대 유적의 사례는 매우 적은데, 봉룡동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고, 백석동 고재미골 유적에서 주거지 1기(基)가 확인되었을 뿐이다. 백석동 고재미골 유적은 해발 60~100m의 구릉상에 입지하는데, 집 자리의 크기는 길이 440㎝, 너비 430㎝, 깊이 약 20㎝ 정도이다. 내부에서는 불을 피운 흔적이 확인되며, 빗살무늬 토기 조각과 갈판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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