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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정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697
한자 光山鄭氏
영어공식명칭 Gwangsan Je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광산 - 광주광역시
묘소|세장지 정신호의 묘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증심사 입구 무량골지도보기
성씨 시조 정신호(鄭臣扈)

[정의]

정신호를 시조로 하는 광주광역시의 세거 성씨.

[연원]

『세종실록지리지』에 광산현 토성 13성 중 일곱 번째 성씨로 정(鄭)씨가 나온다. 조선조 광산현 인물란의 세 번째로 정구진(鄭龜晉)이 나온다. 정씨 집안은 광산 본관을 쓰는 집안과 광주 본관을 쓰는 문중으로 나뉘어오다가 1978년 대동보를 만들 때 모두 광주정씨로 통일하기로 합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정구진광주정씨 족보를 보면 시조 정신호(鄭臣扈)의 손자로 나오고 1382년(고려 우왕 8) 문과에 급제한 기록이 있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 보면 시조 정신호의 증손자 정지당(鄭之唐)은 1405년(태종 5)에 문과에 급제해 조선조에 광주 고을 두 번째 등과자로 이름을 올렸다. 조선조 두 번째 광주정씨 등과자는 6세손 정절(鄭晣)로 1468년(세조 14)에, 이어서 1498년(연산군 4)에 정인인(鄭麟仁), 정웅(鄭熊)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조에 8세 정연(鄭淵)이 1515년, 정서(鄭犀)가 1516년, 정만종(鄭萬鍾)이 1516년, 정인영(鄭仁寧)이 1544년 등 4명이 급제하고, 명종조에 정엄(鄭淹), 정인관(鄭仁寬), 정인귀(鄭仁貴), 정영신(鄭英臣), 정의신(鄭誼臣), 정사위(鄭士偉) 등이 급제하여 모두 14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이는 같은 시기 광산이씨 10명보다 앞선 것이다. 다만 이 집안은 3세 정인진 집안이 광주를 지킨 데 반해 정인진의 동생 정구진 동백공파 후손들은 광주를 떠나 경기도 양주 지방에 살아 광산이씨들보다 빛을 내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정구진의 둘째아들 정지하(鄭之夏)의 손자 정윤적(鄭允勣)이 광산이씨의 사위가 되어 다시 광주로 되돌아오고 정윤적의 아들이 정만종(鄭萬鍾)이며, 정만종의 아들이 남구 양림동에 효자정려비가 있는 정엄(鄭淹)[1528~1580]이다.

광주정씨 집안에서 조선조에 33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압촌의 제주고씨 고자검의 사위가 되어 압촌정씨가 된 사람은 정인진의 5세손 정응종(鄭應鍾)의 아들 정서(鄭犀)이다. 정서의 아들 정인영도 아버지에 이어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숙주의 할아버지 신포시도 광주정씨 시조 정신호의 사위가 되어 광주에 정착하였다. 광주탁씨 탁신은 3세 정인진의 사위였으며, 정신호의 손녀사위가 순천박씨 박가흥(朴可興)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도 광주정씨이다.

[현황]

광주 본관 정씨는 광주광역시에 1,449명이 살고 있으며, 광산 본관 정씨는 474명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시조 정신호의 묘는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증심사 입구 무량골에 설단해 모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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