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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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公害發電所新孝泉- |
이칭/별칭 | 향등마을,행촌마을,태양광 마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별 |
[정의]
2004년 광주광역시 남구 행암동에 조성된 국내 최초의 태양광 마을.
[개설]
신효천마을은 500여 년의 역사와 70여 호의 규모를 가진 향등마을 주민들이 1998년 광주광역시 광역위생매립장 후보지 모집에 자원하여 매립장 부지로 확정됨에 따라 2003년 10월 마을주민들이 행암동으로 집단 이주하여 형성되었다. 2004년 11월, 남구청의 제안으로 산업자원부와 에너지관리공단에서 시행하는 대체에너지 보급사업의 보조금을 받아 국내 최초 마을 전체 가구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하였다. 2004년 12월 각 가구당 2.1㎾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태양광 발전설비가 완비되어 ‘태양광마을’로 탈바꿈하였다.
이로써 한 달 전기료 200원, 여름철 최대 5,000원[연간 연료비 1,500만 원, 전기사용료 2,200만 원]의 절감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으로 평가받으며 인근 마을로 파급되는 효과까지 거두었다. 하지만 태양광 전지판의 내구연한인 15년이 넘으면서 장비가 노후화됨에 따라 설치 초기에 비하여 태양열 발전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남구청은 폐촉법 제22조[주민지원기금에 의한 주변 영향지역의 지원]에 근거하여 주민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광역위생매립장 간접영향권 2㎞ 내 주민에 한하여 태양광 발전시설 수리 및 주거환경개선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명칭 유래]
신효천마을은 2003년 10월 남구 양과동 향등마을 일대에 광주광역시 광역위생매립장[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26]이 들어서면서 마을주민들이 집단 이주하여 형성되었다. 새로 이주한 곳은 기존 마을에서 약 2㎞ 떨어진 효천역 부근[행암동 509-1, 신효천1길 3]이다. 이에 마을 이름을 ‘새로운 효천마을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담아 신효천마을로 지었다. 주민들의 본래 삶의 터전이었던 향등(香燈)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인 안산의 모양이 풍수지리적으로 등잔의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 또 주위의 산야에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가 많아 봄에 꽃향기가 가득하다고 하여 행화촌(杏花村)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자연환경]
향등마을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나주시, 화순군의 경계를 이루는 정광산(淨光山)[353m]과 나주시 남평면과 경계를 이루는 건지산(乾芝山)[326m], 그리고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동과 경계를 이루는 안산[222.5m]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고 빗물의 배제 처리가 손쉬운 자연환경은 광역위생매립장이 설립되기에 가장 적합한 입지 조건이었다.
향등마을 주민들은 예부터 농업과 과수재배로 생업을 이어왔다. 농토는 대부분 건지산 자락에 있는 좁은 골짜기의 곡간충적지로 임야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경지면적은 논 0.26㎢, 밭 0.21㎢, 임야 0.68㎢로 임야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식량작물을 주로 재배하다가 광복 이후 처음으로 산에 밤나무, 산수박, 참외 등을 경작했다고 한다. 특히, 1960년대 말에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 계기가 되어 포도의 경작이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포도 판매는 주민들의 생계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향등마을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군 유곡리(柳谷里)의 향등촌(香燈村)이었던 마을은 구한말에 광산군(光山郡) 유등곡면(柳等谷面)의 향등리(香燈里)가 되었다. 1914년 면리제 개편 때 광주군 대촌면에 속하게 되고 1957년 광주시의 영역 확장에 따라 대촌출장소 송석동이 되었다가 1963년 광산군 대촌면으로 다시 재편입되었다. 1988년 광산구 대촌출장소가 되고 1996년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구역에 소속되었다. 1998년 광주광역시는 광역위생매립장 후보지를 공개적으로 모집하였다. 향등마을 주민들이 8월 29일 자원 응모함으로써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심의와 타당성 조사 등을 거쳐 매립장 부지로 확정됨에 따라 2003년 10월 마을주민들이 행암동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향등마을에 정확히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알려진 바는 없으나 삼한시대부터 개촌된 옛터[古基]라고 전해지고 있다. 2001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향등마을 주변에는 초기철기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물산포지 4곳을 비롯하여 돌덧널무덤와 절터 등이 발견되어 적어도 삼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도 조사보고서에서는 마을의 당산나무로 수호되는 팽나무와 보호수인 굴참나무의 수령이 500여 년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현재의 자리에 마을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향등마을 터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이 어떠한 성씨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향촌마을 부근을 중심으로 선주민인 설씨들이 마을을 형성해 오랫동안 세거하였으며, 조선 초에 경주김씨들이 입향했다가 이거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경주최씨를 비롯한 현주민들이 순차적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의 『호구총서(戶口總數)』[1789년]에는 광주목(光州牧) 유등곡면 지역으로 향등촌이 가장 먼저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어 조선시대 후기에는 꽤 규모가 있는 마을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농업에 기반을 둔 향등마을은 비교적 민속적인 전통을 잘 지켜온 마을에 속하였다. 5월 단오의 화전놀이, 여름철의 풀베기 풍습, 정월대보름의 당산제와 마당밟이, 상쇠의 계보가 생생한 농악놀이 등이 1960년대까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향등마을의 당산제는 '도제(都祭)' 또는 '당산제'라고 불렸다. ‘도제’는 ‘어느 제사보다 큰 제사’라는 의미인데 인근 마을인 노대나 덕남에서도 이 명칭으로 불리었다. 향등마을 당산제의 역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약 1800년대 경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향등마을의 당산제는 매우 씩씩하여 칠석동만큼이나 성행했었으나 6.25전쟁 발발 이후 1960년대 이전에 사라졌다고 한다.
향등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2곳이 있었다. 할아버지 당산[철륭]은 팽나무로 마을의 뒤편인 동쪽 능선 아래에 있었다. 본래의 당산나무는 매우 큰 고목이었으나 1980년대쯤 고사(枯死)하였다. 이후 아들나무들이 자랐는데, 이 나무들이 당산으로 상징되었다. 당산나무 옆에는 헌식터인 흙무덤이 있었다고 하나 2001년 광주시립민속박물관의 조사 당시에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할머니 당산은 마을의 동쪽편 향등제(香燈堤)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팽나무이었다. 이 나무는 약 1500년대 경부터 자리를 지켜왔으며 수형이 좋게 자라 마을의 경치를 더욱 멋스럽게 더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는 수령이 오래된 굴참나무[남구청 보호수로 등록, 등록번호:10-6-7]가 있어 주민들이 보호 관리하고 있었다. 매년 5월 8일 이곳은 경로잔치를 벌여 마을주민들의 상호유대와 일체감을 조성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당산제는 정월 14일 밤 11시부터 시작해 한 시간 동안 진행하였다. 제를 모시기 전 마을의 청년들은 초저녁부터 굿을 쳐 쇳소리를 냄으로써 당신(堂神)에게 제사올림을 알린다. 두 곳의 당산나무와 문지기 등 3곳을 먼저 치는데, 할머니 당산은 굿을 좋아해서 많이 치고 할아버지 당산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약간만 쳤다. 그런 후에는 마을을 일정한 경로대로 돌며 치는데 왼쪽으로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한다. 시간이 되면 건화주가 제물을 들고, 제관·굿꾼·마을주민의 순으로 따라 할아버지 당산으로 오른다. 제물은 촛불을 켠 뒤, 돼지머리 위턱·찰밥·시금치·콩나물·무우나물·떡·명태[실을 감는다]·사과·배·대추·감 등을 백지에 싸서 상위에 올린다. 제의는 유교식 절차에 의해 초헌-독축-아헌-종헌의 순서로 모신다. 특히, 독축 때는 마을주민들의 소원을 읽은 다음, 마을주민 모두의 이름을 불러 당신에게 고하는 것이 향등마을 제의의 특징이었다. 제사가 끝난 뒤, 흙을 파 헌식을 하고, 인구수대로 소지를 하며, 헌관부터 음복을 한다. 나발을 불어 할아버지 당산에서의 제가 끝났음을 알린다. 이 나발소리를 듣고 각 가정에서는 차례를 올린다.
이후 할머니 당산으로 이동해, 할아버지 당산과 마찬가지로 제의절차를 진행한다. 할머니 당산의 제사가 모두 끝나면 준비한 도지나무를 피우면서 날이 샐 때까지 논다. 놀이는 농악대가 주재한다. 향등마을의 농악은 유서가 깊고 매우 활발하였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도 상쇠의 계보가 전해지고 있다. 상쇠의 계보는 ‘김몽수, 최계수, 최덕진, 최수판, 최수익, 김영진’ 순으로 이어졌는데,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광주공원까지 가서 걸궁을 하고, 상치꾼으로 팔려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2001년까지도 박종만[당시 67세]으로 이어지면서 명맥을 이어갔다. 이러한 전통을 간직한 향등마을의 마당밟이가 매우 성행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마을사람들은 설날 후부터 정월 14일까지 농악놀이에 필요한 고깔이나 소고 등 굿물을 만들고, 보름에 굿이 잘되도록 수시로 손을 맞추어 보았다. 농악은 일차적으로 당산제에 소용되어 당신(堂神)을 즐겁게 하고 제의를 순조롭게 이끌며, 할머니 당산의 놀이판을 주재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선후회(先後會)가 주관하여 매년 5월 8일 경로잔치를 함으로써 현대적으로 전승되기도 하였다.
[태양광 에너지 마을]
향등마을 주민들이 이주한 이후, 남구청은 주민들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태양광 설비를 제안하였다. 총사업비 15억 1000만 원 중 광주광역시가 70%인 10억 5000만 원을 지원하고, 주민들이 나머지 30%를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이에 2004년 11월 산업자원부와 에너지관리공단에서 시행하는 대체에너지 보급사업의 일환으로 각 가구당 2.1㎾/h의 전기를 생산하는 태양광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신효천마을은 국내 최초로 마을 전체 64가구에 태양광이 설치된 ‘솔라시티’로 이름을 알렸다. 마을 전체 에너지 사용량의 절반 이상을 태양광과 태양열 등 신재생 에너지로 공급하여 온실가스 배출량이 적은 녹색마을이 된 것이다. 마을회관 옥상에는 발전용량이 5㎾/h인 태양광 패널과 집열기 용량이 40㎡인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하였다. 태양광 패널은 전력생산, 태양열 집열판은 온수난방 등에 쓰인다.
신효천마을은 2004년 12월부터 가동된 태양광 시스템으로 연간 총 193㎽의 전력을 생산하였다. 이는 가구당 연평균 약 36만 원의 전기료 절감효과를 가져다주었다. 독거노인의 경우는 기본료만 부담하도록 하는 한편, 신효천마을은 2007년 태양광 설치의 우수 사례로 산업자원부가 주관하는 공모전에서 민간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후 광역위생매립장 직접 영향권[반경 2㎞] 내 500여 가구[10여 개 마을]에도 매립장 주민 대책위원회의 지원으로 태양광 설비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남구 행암동의 동도마을이다. 동도마을은 신효천마을의 파급효과로 2006년과 2007년에 걸쳐 전체 70가구 중 55가구가 국비 60%의 보조를 받아 태양광을 설치하였다.
[현황]
2004년 최초 설치 이후, 태양광 전지판의 내구연한인 15년이 넘으면서 장비가 노후화됨에 따라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기사에 따르면 2017년 전체 가구의 60%가 한 차례 이상 장비 이상으로 수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마을 이주 초기와 달라진 주변 환경도 태양광 발전 효율을 떨어뜨린 요인 중 하나로 꼽혔다. 신효천마을 인접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단지와 인접한 10가구가량의 주택은 아파트 그림자로 인해 이미 발전 효율이 크게 떨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이에 마을주민들은 ‘국내 최초 태양광 마을’이라는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피력하였다. 이에 남구청은 ‘광역위생매립장 주변지역 주민숙원사업’의 일환으로 태양광 발전시설 수리 및 주거환경 개선사업 등을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