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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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昌洞梅結-堂山祭 |
이칭/별칭 | 신창동 매결마을 동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부유진 |
중단 시기/일시 | 1910년대 일제강점기 초 - 신창동 매결마을 당산제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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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할아버지당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매결마을 뒤 |
성격 | 마을 공동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흗 날 밤 |
신당/신체 | 할아버지당산[느티나무]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매결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에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신창동 매결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매결마을의 할아버지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매결마을은 뒷산에 자생하는 매화꽃이 만발하고 마을의 모습 또한 매화가 열매를 맺은 것 같다 하여 매결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때 청안이씨(淸安李氏)의 이주와 정착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산제는 마을 형성 이후부터 지냈던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 초에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매결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당산으로 마을 뒤쪽 고갯마루에 있는 느티나무가 신체에 해당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묘를 쓰기 위해 벌목(伐木)하여 없어졌다고 한다.
[절차]
신창동 매결마을 당산제는 정월 초에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1명, 상집사[축관] 1명, 하집사[제관] 1명, 음식 준비인 1명 등 모두 4명을 선출한다. 화주는 선정된 날부터 상가 등 궂은 곳을 출입해서는 안 되며, 개고기 등의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된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 매일 찬물로 목욕을 해야 하고, 용변 후에도 목욕재계를 해야 하므로 어려움이 많았다. 제비(祭費)는 각 가정의 형편에 따라 거출하였는데, 서로 공을 들이고자 하였으므로 모금이 어렵지는 않았다. 제물(祭物)은 매우 간소하게 하였으므로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물의 장만은 화주가 하며, 구입할 때 값을 깎지 않는다. 제기(祭器)는 마을에서 일괄 구입하여 보관하였던 것을 깨끗이 씻어 다시 사용한다. 제수(祭需)를 준비할 때는 말을 하지 않고 맛을 보지 않는 등 청결에 각별히 주의한다. 돼지는 잡아서 머리는 제에 쓰고, 몸통은 제가 끝난 후 가정마다 적당히 나눈다. 정월 10일경이 되면 화주집, 당산 주변, 마을 골목에 금줄을 쳐서 부정의 출입을 막는다. 정월 열나흗날 밤이 되면 할아버지당산에 올라가서 제를 모시는데, 일반 가정의 제사 절차와 유사하다. 제관들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유건을 쓴다. 진설한 제물을 조금씩 떼어 흰 종이에 싸서 당산나무 옆에 땅을 파고 묻어 헌식을 하면 제가 끝난다.
[축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읊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고 정월 대보름날부터 그믐날까지 마당밟이가 이어진다. 마을 공동샘을 시작으로 화주집, 제관집을 돈 후 각 가정을 방문하여 굿을 친다. 이때 집집마다 음식과 술을 내어놓아 즐겁게 먹고 논다. 음력 2월 1일에는 마을회의를 열어 당산제를 결산하고, 새로운 이장 선출을 비롯한 마을 운영의 전반을 논의한다.
[현황]
신창동 매결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때 묘를 쓰기 위해 당산나무를 벌목(伐木)한 후 중단되어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