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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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飛鴉洞-堂山祭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부유진 |
시작 시기/일시 | 조선 후기 - 비아동 큰도랑질마을 당산제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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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 시기/일시 | 일제강점기 말 - 비아동 큰도랑질마을 당산제 중단 |
의례 장소 | 느티나무 -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 옛 큰도랑질마을 앞 |
성격 | 마을 신앙|동제 |
의례 시기/일시 | 매년 음력 1월 15일 낮 12시 |
신당/신체 | 느티나무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에 있었던 큰도랑질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며 지냈던 마을 제사.
[개설]
비아동 큰도랑질마을 당산제는 매년 음력 1월 15일 낮 12시 즈음부터 큰도랑질마을[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의 할머니 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큰도랑질마을은 17세기에 광산김씨(光山金氏), 순천박씨(順天朴氏) 등이 이주·정착하여 형성되었다. 당산제는 이후부터 시작되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이나, 일제강점기 말 일본 순사가 굿물을 빼앗아 가는 등 전통문화에 대한 억압이 심해져 전승이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마을 앞의 느티나무를 할머니 당산의 신체(神體)로 모셨다.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느티나무를 벌목하여 지금은 흔적도 없다.
[절차]
음력 1월 7일경에 마을 회의를 열어 화주, 헌관, 집사, 축관 각 1명씩 모두 4명을 선정하였다. 특히 화주는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뽑는데, 선정된 날부터 상가 등 궂은 곳을 출입해서는 안 된다. 화주가 결정되면, 다음날 화주 집 앞과 당산 주변 등에 마을의 깨끗한 젊은이들이 금줄을 쳐 부정한 것의 출입을 막았다.
비아동 큰도랑질마을 당산제는 걸궁[걸립(乞粒)]의 비중이 컸다. 걸궁으로 거두어들인 돈은 굿물을 구입하고 마을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제물은 돼지 한 마리를 비롯하여 과일, 마른 명태, 삼채 등을 준비한다. 제사 음식은 화주 집에서 장만하는데, 마을의 깨끗한 사람이 화주를 돕는다. 이때 음식을 하면서 음식 맛을 미리 보면 안 된다.
[축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축관이 읊었다. 지금은 중단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면 당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닥불을 피워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저녁 늦게까지 놀았다.
[현황]
비아동 큰도랑질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말 일본 순사가 굿물을 빼앗아 가는 등의 억압 때문에 중단된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