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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265
영어공식명칭 Hwang Hogeo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진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60년 10월 7일연표보기 - 황호걸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80년 5월 - 황호걸 광주제일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3학년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80년 5월 18~23일 - 황호걸 5.18민주화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80년 5월 22~23일 - 황호걸 전라남도청에서 사망자 시신 수습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80년 5월 23일연표보기 - 황호걸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0년 5월 29일 - 5.18구묘지 안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 6월 - 5.18구묘지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
학교|수학지 광주제일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 전라남도 광주시 북구 누문동 지도보기
활동지 옛 전라남도청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26번길 지도보기
묘소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운정동 563]지도보기
성격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성별
대표 경력 광주제일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

[정의]

전라남도 광주시에 거주하였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개설]

황호걸[1960~1980]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방송통신고등학교에서 공부하며 낮에는 직장에 다니는 근로자였다. 5월 18일부터 시민군으로 활동하다가 5월 22일부터는 옛 전라남도청에서 사망자 시신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다. 5월 23일 황호걸은 수 명과 함께 사망자를 수습할 관을 구하러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가던 중 길목에서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황호걸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화천기공에서 근로자로 일하면서 광주제일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1995년 2월 폐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황호걸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5.18민주화운동 직후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던 황호걸은 5월 21일 밤에 총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놀라서 총을 장농에 감추었다가 5월 22일 아들에게 총을 돌려주며 반납하라고 하였고, 황호걸은 총을 가지고 다시 전라남도청으로 갔다.

전라남도청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들이 많았다. 황호걸전라남도청에서 시신을 확인하러 오는 가족들을 안내하고, 피로 얼룩진 시신들의 몸을 닦아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짧은 기간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여 시신을 담을 관이 부족하였다.

5월 23일 황호걸을 비롯한 학생과 시민군 수 명이 부족한 관을 구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향하였다. 버스가 화순군으로 가는 길목인 전라남도 광주시 지원동[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을 지날 때 매복해 있던 군인들이 버스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이때 황호걸을 비롯하여 버스에 동승했던 사람들 전원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황호걸의 사망 원인은 복부 및 하지 총상이었다. 5월 27일 5.18민주화운동이 끝난 뒤 황호걸전남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졌다.

가족들은 집에 돌아오지 않는 황호걸을 찾아다녔지만 만날 수 없었다. 5월 29일 광주시 동구 지산동파출소에서 황호걸의 시신이 전남대학교 병원 영안실에 있으니 확인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가족들은 전남대학교 병원에서 황호걸의 시신을 수습하여 망월묘지공원[5.18구묘지]에 안장하였다. 1997년 6월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었다.

[묘소]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지번호는 2-13이다.

[상훈과 추모]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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