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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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Yang Minse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진우 |
출생 시기/일시 | 1960년 9월 1일 - 양민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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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5월 22일 - 양민석 행방불명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8년 - 5.18구묘지에 무명열사로 안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1년 10월 - 양민석 신원 확인,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 |
거주|이주지 |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 |
묘소 |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운정동 563] |
성격 |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광주 시민 |
[정의]
전라남도 광주시에 거주하였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개설]
양민석[1960~?]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자신이 거주하던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 지원동[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 근방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행방불명이 된 지 8년 뒤에야 행방불명자로 인정을 받고 무명열사로 망월묘지공원[5.18구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또 21년 뒤 유전자 감식으로 무명열사들의 신원이 확인되어 2002년 12월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었다.
[활동 사항]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은 전라남도 광주시를 봉쇄하기 위해 외부로 통하는 여러 길목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동구 지원동은 그중 한 곳이다. 양민석은 당시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 지원동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이다.
5월 22일 오전, 양민석의 집 도로 건너편에 살고 있었던 형수에게 김치를 가져다 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던 순간 총성이 울렸고, 이후 마을을 향해서도 총격이 가해졌다. 이때 양민석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고, 양민석의 형수는 총상을 입었다. 형수는 몸에 박힌 총알을 빼내기 위해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민석은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1988년 양민석의 형수는 자신의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보상 신고와 함께 양민석을 행방불명자로 신청하였다. 1차 보상에서 행방불명자로 인정된 사람은 7명뿐이었는데, 양민석은 정황이 명백하여 행방불명자로 인정받았다.
2001년 10월 망월묘지공원에 무명열사로 안장되어 있던 무연고 희생자들의 신원 확인을 위한 유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1년 뒤인 2002년 유전자 감식 결과, 가족들의 유전자와 일치하는 유골이 나왔다는 통보가 왔다. 2002년 12월 양민석은 자신의 이름을 찾아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었다.
[묘소]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지번호는 4-91이다.
[상훈과 추모]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