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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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允鎬 |
영어공식명칭 | Lee Yun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효선 |
[정의]
일제강점기 광주 3.10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윤호(李允鎬)[1898~1931]는 1919년 3월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윤호의 아버지인 이주상(李周祥)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 처음으로 개신교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전라남도 광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붙잡혀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윤호의 동생 이창호(李昌鎬) 역시 숭일학교 재학 중 광주 3.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된 뒤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이윤호는 1919년 3월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에서 동생 이창호, 처남 유계문(劉桂文)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시내로 진입하여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3일 기각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5월부터 1922년 9월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인 한준호(韓俊鎬), 박문용(朴文鎔)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노진영(盧軫永), 신대선(辛大善) 등에게 권총을 가지고 군자금 모집에 관한 취지문을 발송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고, 1922년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1924년 12월 31일까지 옥고를 치렀다.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운동가 제2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광산이씨(光山李氏) 종중에서는 1968년 이윤호의 공적을 기려 '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愛國志士光山李公允鎬功蹟碑)'를 세웠다. '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는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산 16번지 한새봉농업생태공원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