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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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昌鎬 |
영어공식명칭 | Lee Chang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보라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8월 15일 - 이창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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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이창호 광주 3.10만세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13일 - 이창호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확정 |
몰년 시기/일시 | 1931년 3월 24일 - 이창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이창호 건국포장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 |
학교|수학지 | 광주숭일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모룡대길 40[일곡동 46-24]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숭일학교 학생 |
[정의]
광주 3.10만세운동에 참여한 전라남도 광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창호(李昌鎬)[1902~1931]는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숭일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 이주상(李周庠)과 함께 광주 3.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만세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독립만세 시위는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김철(金鐵), 최병준(崔丙浚) 등 청년들과 기독교인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주도자들은 계획에 따라 태극기 및 「독립선언서」 제작, 시위 군중 동원 등 만세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과 남구 사동을 잇는 다리] 아래에 수백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숭일학교[지금의 광주숭일고등학교] 재학 중이었던 이창호는 아버지 이주상과 함께 부동교 아래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고무하였다.
이창호는 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1919년 4월 13일 광주지방법원을 거쳐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이 확정되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이창호는 1931년 3월 2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