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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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基燮 |
영어공식명칭 | Lee Giseop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의병.
[개설]
이기섭(李基燮)[1883~?]의 출생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기섭이 체포될 당시인 1909년 5월 7일 광주경찰서에서 남긴 '폭도체포의 건'[광경비수(光警秘收) 제385호] 문건에 26세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883년생으로 추정할 뿐이다. 아울러 이 문서에는 이기섭의 본적 또한 전라남도 광주군 서양면 경양촌(景陽村)으로 나온다. 이와 달리 「수형인명부」와 「형사공소사건부」에는 주소로 광주군 석제면 외촌(外村)이라 기재되어 있다. 이기섭은 김동수(金東洙)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에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다가 광주경찰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이기섭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광주에서 김동수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후에는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또 다른 광주경찰서의 문건[전남경비발(全南警秘發) 제565호, 폭도정찰의 건]에는 이기섭이 군인 출신이라고 나온다.
1908년 12월 이기섭은 의병 10~12명과 함께 광주군 황계면 죽림촌(竹林村)과 대내동(大內洞) 등에 나타나는 등 1909년 5월 초까지 전라남도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7일 전라남도 광주군 석제면 외촌에서 잠복하고 있던 이기섭은 광주경찰서 일본인 순사 야마키 코타로[山木好太郞]와 한인 순사 2명에게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폭동죄 및 강도죄, 모살죄(謀殺罪)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며, 1912년 칙령 제23호에 의해 징역 5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