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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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東洙 |
영어공식명칭 | Kim Dong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 등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김동수(金東洙)[1879~1910]는 전라도 광주군 경양면 병문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우산동]에서 출생하였으며, 포목상(布木商)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밀정을 총살하였으며, 약 5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남도 광주군 덕산면 덕산리,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 본촌 등지에서 일제와 교전하였다.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활동 사항]
김동수는 1906년 대한제국 군대에 입대하여 사관이 되었으나, 군대가 해산되자 1907년 이원오(李元五), 조경환(曺京煥), 양상기(梁相基), 김현길(金玄吉) 등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에서 의병 부대를 조직하였다. 1908년 김동수는 양진여(梁振汝) 의진과 합진하였다. 1908년 2월 양진여 의병장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5~6명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의 친일 면장(面長) 집에 들어가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1909년 1월 12일에도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 복용리에서, 1909년 2월 하순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오치면에서, 1909년 3월 15일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삼취지동(三取旨洞)에서 군수품을 모았다. 그리고 1909년 4월 1일과 1909년 4월 2일에는 담양군 창평 지곡(芝谷)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징수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후 양진여 의진에서 분진(分陣)하여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남도 화순 등지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09년 4월 20일에서 5월 18일 사이에 김동수 외 여러 명이 전라남도 광주군 오치면에서, 그리고 김포수(金砲手) 외 1명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에서 각각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1909년 5월 19일에는 김동수와 김동수의 부하들의 활동을 일본 헌병대에 밀고한 전라남도 광주군 덕산면 이장 정현구(丁鉉玖)에게 총격을 가하고 면장 백계수(白桂洙)를 총살하였다.
1909년 5월 19일 오후 2시 김동수가 이끄는 약 50명의 의병이 전라남도 광주군 덕산면 덕산리에서 광주분견소 쇼요[小葉] 상등병의 부대와 접전하여 의병 14명이 전사하였다. 1909년 5월 31일 오후 4시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 본촌 김영소(金永訴) 집에서 광주경찰서 카사마[笠間] 순사부장 외 11명에게 포위되어 의병 4명이 전사하였으며, 퇴각하다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 본촌에서 광주경찰서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이후 1909년 9월 사창(社倉) 전투에서 체포되었다.
1910년 2월 22일 김동수는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