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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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永淇 |
영어공식명칭 | Yun Yeonggi |
이칭/별칭 | 경안,정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병남 |
출생 시기/일시 | 1871년 6월 10일 - 윤영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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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월 24일 - 윤영기 고광순 의병부대 호군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4월 26일 - 윤영기 도마치 전투 참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윤영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자금 모금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71년 2월 22일 - 윤영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윤영기 건국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윤영기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전라도 광주목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고광순 의병부대 호군 |
[정의]
개항기·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의병·독립운동가.
[개설]
윤영기(尹永淇)[1871~1971]은 전라도 광주목[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자는 경안(京安)이며, 호는 정재(貞齋)이다. 영기(泳琪) 또는 영기(泳祺)라고 한다. 고광순(高光洵) 의병부대의 호군(護軍)에 임명되어 전라남도 일원에서 활동하였으며, 고광순 의병부대가 무너지자 살아남은 병사들을 인솔해 운봉·함양·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10여 년을 숨어 지냈다. 또한, 1919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1907년 1월 24일 윤영기는 전라남도 창평에서 창의의 기치를 올린 고광순 의병부대의 호군으로 임명되었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전라남도 남원의 양한규(梁漢奎) 의병부대의 요청으로 연합전선을 펴 남원성을 공략하고자 진격하였으나, 이미 양한규 의병부대가 패배하였으므로 퇴각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능주[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사림의 협력을 받아 1907년 4월 25일 윤영기 등이 화순읍을 점령하고, 일본인 거주 가옥을 모두 불태워 고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1907년 4월 26일 다시 동복[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으로 진군하였는데, 전라남도 광주부에서 파견된 정부군과 도마치(圖馬峙) 전투에서 패배하여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1907년 8월 고광순 의병부대는 창평 제심리를 중심으로 다시 집합해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장기 항전을 준비하면서 1907년 9월 14일 새벽에 동복을 공략하고 많은 일본인들을 살해하였다. 이후 남원, 곡성 등지를 지나며 격문을 보내 인심과 사기를 고무하고, 1907년 9월 17일 지리산 화개동으로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때 동복·순천·곡성·광양·구례 등지에서 군사로 참가하는 자가 1000명을 헤아렸다.
윤영기는 신덕균(申德均)과 함께 산을 벗어나서 전라남도 광주 진위대(鎭衛隊)의 해산병 등을 수습하며 더 많은 군사들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1907년 10월 16일 일본군의 기습으로 고광순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들이 전사하고 의병 부대가 무너지자, 군사 모집차 산을 내려가 화를 피했던 윤영기는 살아남은 병사들을 인솔해 운봉·함양·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10여 년을 숨어 지냈다.
1919년 윤영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언문을 군중에게 살포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10월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