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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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德均 |
영어공식명칭 | Shin Deokgyun |
이칭/별칭 | 정효,몽암,신덕순,신정효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병남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 신덕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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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8월 - 신덕균 고광순 의병부대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 - 신덕균 고광순 의병부대 동복 전투 참전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11월 - 신덕균 회문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08년 - 신덕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신덕균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신덕균 건국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신덕균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10월 - 고광순 의병장 전사 |
출생지 | 전라도 광주목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고광순 의병부대 참모 |
[정의]
대한제국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의병.
[개설]
신덕균(申德均)[1878~1908]은 전라남도 광주목[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각화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정효(正孝) 또는 몽암(蒙庵)이라 하였고, '달리는 신덕순(申德淳), 신정효(申正孝)'라고도 불렸다. 고광순(高光洵) 의병부대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고광순 의병부대가 무너지자 가산을 팔아 무기를 갖추고 의병 100여 명을 모아 재기하여 운봉·함양·순창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1월 전라북도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신덕균은 일찍이 기우만(奇宇萬)과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동지를 규합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 1907년 초에 고광순이 의병의 기치를 들고, 1907년 4월 25일 전라남도 화순을 점령하고 이튿날 동복[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신덕균은 종제(從弟)인 신상철(申相徹)을 대동하고 동복으로 갔으나 이미 고광순 의병부대가 패배하여 후퇴한 뒤여서 부득이하게 집으로 돌아가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신덕균 등 전라남도 광주 부근의 의병장들은 일단은 군사를 숨기거나 기회를 보아 수시로 유격전을 전개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1907년 8월 신덕균은 고광순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창평 제심리를 중심으로 집합해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하고, 이를 위해 총기 등을 개량 제조하며 여러 가지 전법까지 훈련하였다. 또 태극기 위에 '불원복(不遠復)'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 군기로 사용하며 군사들을 격려하는 등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지리산에 들어가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는데, 참모인 신덕균이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복을 공략할 것을 제의하여 1907년 9월 14일 새벽에 동복을 공략하고 많은 일본인들을 살해하였다. 이후 남원, 곡성 등지를 지나며 격문을 보내 인심과 사기를 고무하고, 1907년 9월 17일 지리산 화개동으로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는데, 동복·순천·곡성·광양·구례 등지에서 군사로 참가하는 사람이 1000명을 헤아렸다. 신덕균은 산을 벗어나서 전라남도 광주 진위대(鎭衛隊)의 해산병 등을 수습하며 더 많은 군사들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1907년 10월 16일 일본군의 기습으로 고광순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들이 전사하고 의병대가 무너지자, 군사 모집차 산을 내려가 화를 피했던 신덕균은 살아남은 병사들을 인솔해 운봉, 함양, 순창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1월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전라북도 고부군[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