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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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郭 |
영어공식명칭 | Castle|City Wall |
이칭/별칭 | 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배재훈 |
[정의]
광주광역시에 있는 관방유적으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높은 담을 세운 방어 시설.
[개설]
성곽이란 성(城)과 곽(郭)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성은 지배자의 주거지나 성역 등을 보호하기 위해 네모꼴로 쌓은 방어벽[성벽]을 말하며, 내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곽은 이러한 성의 외부를 둘러싼 바깥의 방어벽을 의미하며, 일반 백성의 주거지를 보호하는 구조로 외성 혹은 나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와는 달리 성과 곽이 모두 나타나는 경우는 일부 도성이나 군사적 요충지 등에 한정되며, 단일한 성벽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이나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 그리고 고려의 수도 송악성 정도에서나 이런 이중의 성곽 배치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평지의 일반적인 성과 산지의 방어용 성곽이 함께 배치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평지성은 읍성이나 도성 등으로 일상적인 생활이나 도적에 대응하는 수준으로 사용되는 반면, 산성은 외적의 대대적인 침입이 있을 경우 평지성을 버리고 들어가 유리한 지형에서 적을 물리치거나 적이 돌아갈 때까지 농성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때 사용된 산성 중에는 옛 치소성(治所城)이 포함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왜구의 침입을 일상적으로 받는 시기를 지나면서 평지성인 읍성도 성벽을 높이거나 석성으로 다시 쌓고, 옹성(甕城)이나 치(雉), 해자(垓子) 등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유형]
성곽은 축조된 위치, 사용자, 기능, 재료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축조 위치에 따른 분류로는 평지의 평지성, 산지의 산성을 들 수 있다. 사용자에 따른 분류에는 왕이 거주하는 궁성이나 도성, 군부대가 주둔하는 진성(鎭城), 지방관과 관속이 거주한 읍성 등이 언급될 수 있다. 수도나 부(府)·목(牧)·군(郡)·현(縣)의 지방 행정기구의 치소가 있는 지역을 방어하는 성을 치소성이라 하는데, 전자는 도성이라 부르고, 후자는 읍성이라 불렀다. 여기에는 평지성으로 축조된 병영성과 같은 일부 진성이 포함될 수 있다.
건축 재료에 따른 분류에는 나무를 주재료로 쓴 목책이나 목책성, 흙을 사용한 토성,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석성, 흙과 돌을 함께 사용한 토석혼축성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성곽의 축조 재료로 벽돌도 일부 사용되었으나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구조]
성곽의 주요 구성 요소로는 우선 주된 몸체를 이루는 체성(體城)을 언급할 수 있다. 체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성곽 그 자체에 해당하는데, 흙이나 돌 등 높이 쌓을 수 있고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재료가 선택되었으며, 그 위에는 방어 병력이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작은 담장인 여장(女墻)을 세웠다. 그리고 성곽으로 출입하기 위해 문을 설치하였다. 문은 대체로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 모두 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산성은 지형상 제약을 받을 경우 네 방향의 문을 모두 갖추지 못하기도 하였다.
성문 위에는 드나드는 사람의 감시나 군사 지휘를 위한 누각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체성의 일부에 보완 시설을 설치하였다. 성문은 출입을 위해 체성의 일부를 잘라서 낸 것이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옹성이나 적대(敵臺)를 설치하였다. 또한, 체성이 길게 연결된 부분은 평면적인 방어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돌출된 성벽인 치(雉)를 설치하였다. 평지성은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 한계가 있어서 체성 주변으로 도랑을 파서 방어력을 높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여기에 물을 채우면 해자라 불렀다.
[광주의 성곽]
전통시대의 방어시설인 성곽은 광주광역시에서도 확인된다. 평지성으로는 읍성을 떠올릴 수 있는데, 현재 광주읍성(光州邑城)으로 알려진 조선 초기~일제강점기 초반까지 유지된 성곽 이외에 통일신라시대 무진주의 치소성으로 쓰인 무진도독고성(武珍都督古城), 조선 초기 잠시 전라 병영성으로 쓰인 고내상성지(古內廂城址) 등이 언급될 수 있다. 이 중 무진도독고성은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견훤 정권 초반기에 짧은 시간 도성으로 기능하였을 수도 있다.
산성으로는 무진고성(武珍古城)으로 알려진 무등산 산록의 성곽이 대표적이다.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규모도 큰 편이어서 통일신라시대 혹은 고려 말기 몽골 침입이나 왜구의 침입이 일상적일 때 치소나 도피성 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성곽은 대한제국 말기 의병 항쟁 때도 활용된 바 있다.
그 밖에 현재 광주광역시에서는 동구 무등산 입구에 있는 백제시대 토성으로 추정되는 운림동 성터, 광주호에 인접하여 토석혼축으로 축조된 북구 충효동의 충효동 성터, 복룡산 정상에 있는 테뫼식 소형 성곽인 광산구 용곡동의 용곡동 성터, 견훤 전설이 서린 북구 생용동의 생용동 성터 등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