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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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民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일례 |
[정의]
일제 강점기 광주광역시에서 상해임시정부에 협조할 목적으로 조직된 항일 단체.
[개설]
3·1운동 이후 광주 지역에서는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사전 발각으로 대규모 시위운동이 불가능해졌다. 당시 광주에서 숭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유한선은 평양의 장공섭으로부터 국민회 취지서를 받은 후 상해임시정부 원조를 위해 국민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설립 목적]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재정 원조를 협조할 목적으로 광주 효천면의 유한선, 본촌면의 이주상, 비아면의 허원상 등이 나주군의 최종렬, 김양숙 등과 연락해 가며 상해임시정부에 협조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변천]
1919년 3월 10일 광주 지역의 독립만세운동 이후 대규모 시위운동이 불가능해지자 같은 해 6월 유한선은 이주상, 허원삼 등과 국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해 음력 7월부터 음력 10월 경까지 이주상, 허원삼, 최종렬, 김양숙 등을 중심으로 다수의 주변인 및 교회 신자들에게 국민회 가입을 권유하고 회비를 모았다. 모금한 회비는 이주상 편으로 평양의 장공섭에게 전달하여 상해임시정부로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유한선, 이주상, 허원삼, 최종렬, 김양숙은 지방의 치안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재판 후 유한선은 징역 2년, 이주상과 허원삼은 징역 10월, 최종렬과 김양숙은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국민회는 회원을 모집하여 각 회원에게 1원 내지 4원씩 입회금을 받아 비밀활동을 하였다. 상해임시정부 등 해외기관과 연락하면서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구체적인 사례로 서창면의 김홍두는 1920년 7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면담하고 돌아와 전라도의 통신기반 설치를 위해 활동하였다.
본촌면의 노석정, 노석중, 김아래, 조병철과 효천면의 김정련, 윤영기 그리고 임곡면의 양인묵 등은 1920년 7월부터 화순군의 노형규, 조병렬 및 곡성군의 신유선 등과 함께 서울의 신덕영, 최양옥 등과 연락해 가면서 광주, 화순, 곡성, 담양, 보성 등지에서 임시정부의 자금모금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1년 내지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광주, 전남 지역의 인사들이 상해임시정부 등 해외기관과 연락하면서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로서 광주, 전남 지역의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해 나간 단체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