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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국채보상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64
한자 光州國債報償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손영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3월연표보기 - 광주국채보상운동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07년 12월연표보기 - 광주국채보상운동 종결
성격 사회운동
관련 인물/단체 최성기|대동광문회

[정의]

1907년 5월부터 전라남도 광주를 포함한 전국에서 일본의 국채를 갚기 위해 전개된 운동.

[개설]

1907년 5월 전라남도 광주의 민중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맞서 차관을 갚기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려 하였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막대한 차관 도입으로 1907년 그 빚은 1300만 원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연하게 전개된 광주의 국채보상운동은 비교적 다른 지역보다 늦게까지 참여 열기가 지속되었다.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국채보상운동의 의연(義捐) 단위는 가족, 문중, 상민, 교사와 학생, 향교, 농민 등 다양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제의 재정적 침탈은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심화되었다. 일제는 정치적·경제적 지배에 필요한 경비를 차관으로 충원하였고, 차관이 근대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통치기반을 마련하는 데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경제적 침투 기반을 마련하고자 전라남도 광주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 농공상은행을 설치하였다.

[경과]

1907년 1월 경상남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전라남도 광주는 지방 중에서 보상회 설립에 관한 신문광고를 가장 먼저 내는 것을 시작으로 1907년 3월 29일, 7월 5일에 국채보상의무소(國債報償義務所)를 설치하였고, 대구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의 지회 형태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대동광문회 지회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광주의 국채보상의무소는 상징적 기구로서, 의연금 모금 활동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는 지역 인사들의 자발적 활동이 두드러졌다. 광주의 현직 관료나 유지들은 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 작성 및 발표 등 활동을 이어 나갔다. 최성기(崔聖基)는 전남국채보상기성회(全南國債報償期成會)라는 간판을 붙이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채보상운동에 국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과정에는 언론의 영향이 컸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적극적으로 의연금 납부자 명단을 싣는 등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상황을 알렸다. 1907년 11월 2일을 시작으로 7차례에 걸쳐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광주군민의 이름과 의연금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소개되었다.

[결과]

국채보상운동에 위기를 느낀 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주요 인물을 구속하거나 모금소를 공격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 광주국채보상운동도 무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농업이 중심인 광주 지역민들은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으나, 나라의 빚을 갚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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