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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19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광역시의 역사. 근대나 현대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지칭하기 어려우며, 역사에서 가르치는 '근대'와 '현대'는 지극히 편의적인 구분인 경우가 많다. 한국사에서는 통상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로 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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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부터 1986년까지 광주광역시의 행정구역 명칭. 일제 패망 후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실시된 지방자치제에 따라 1949년 8월 15일 광주부(光州府)는 광주시(光州市)로 개칭되었고, 지방 장관의 명칭도 광주부윤(光州府尹)에서 광주시장(光州市長)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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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부터 1995년까지 광주광역시의 행정구역 명칭. 1986년 11월 1일 법률 제3808호인 「광주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부산·대구·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광주가 전라남도에서 공식적으로 떨어져 나온 11월 1일은 한동안 '광주시민의 날'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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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에 있던 남광주역과 남광주시장 일대를 아울러 부르는 지명. 남광주(南光州)라는 명칭은 행정구역상의 공식 명칭은 아니다. 1930년 경전선(慶全線)이 개통되고 남광주역과 남광주시장이 들어섰는데, 역과 시장이 광주 도심에서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남광주라 부르게 되었다....
해방·미군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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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해방 후에 건국부녀동맹의 광주·전남지부로 결성된 여성단체. 해방 이후 여성의 권익과 지위 확보를 위해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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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직후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의 광주 지부 조직. 광복 직후 전라남도 광주시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가 이미 결성되어 있었다. 당시 광주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곳이어서 지역 지부의 필요성이 적었다. 하지만 점차 각 지역별 건국준비위원회가 세워지면서 전라남도 광주시만의 건국준비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여겨지게 되어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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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의 광주 지부. 해방 직후 새로운 민족국가건설을 위한 준비기관으로 활동해 온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표명하기에 이른다. 또한 9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처럼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지역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도 인민위원회 지부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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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결성된 우익 여성운동단체인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광주지부. 해방 직후 최초의 여성운동단체였던 건국부녀동맹은 좌·우익 갈등의 심화로 좌익계열의 조선부녀동맹, 우익계열의 한국애국부인회, 독립촉성애국부인단 등으로 분화되었다. 이후 우익계열은 1946년 초, 한국애국부인회와 독촉중앙부인단을 통합하여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으며, 이 시기 광주 지역의 여성운동 단체 또한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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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광주광역시에서 결성된 전국반탁학생총연맹의 전남지부.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과가 알려진 이후, 남한의 정세는 좌익의 모스크바3상회의 지지 세력과 우익의 신탁통치반대 세력 간의 갈등 심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반탁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학생단체로 전국반탁학생총연맹이 결성되었다. 광주에서는 광주서중 13인 모임을 중심으로 전남지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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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결성된 청년단체. 1945년 8월 해방 직후 패주하는 일본인이 전라남도 도청의 서류, 집기 등을 빼돌리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해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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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좌익 계열 여성운동단체였던 조선부녀총동맹의 전라남도 지부. 조선부녀총동맹 전라남도 총지부의 설립목적은 조선부녀총동맹의 전체 강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부녀총동맹의 강령은 첫째, 조선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완전 해방을 기함, 둘째,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발전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를 기함, 셋째, 조선 여성의 국제적 제휴를 도모하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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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주고등보통학교 및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생들이 결성한 청년단체. 화랑단은 광주고등보통학교 출신 졸업생 및 광주서중학교 동문들이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정부 수립에 협조하고 사회질서 유지에 앞장설 것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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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1946년 미군정의 미곡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과 시정 요구를 위해 발생한 봉기. 1946년 광복 직후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미군정의 강제적인 양곡 공출, 미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인해 식량난이 계속되자, 대구·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추수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는 노동자 중심의 9월 총파업, 농민 중심의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지는데, 1946년 9~12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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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해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 전라남도 광주에 영향을 미친 사건.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해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는 광주 제5여단에 예속된 제4연대 가운데 제1대대를 기본으로 하여 창설되었다. 제14연대는 광주의 제4연대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서로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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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한반도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 인민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 북위 38도선[삼팔선] 곳곳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총공세를 펼치면서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북한 인민군은 6.25전쟁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뒤, 미군 제24사단과 싸워 대전을 점령하였다. 7월 하순에 접어들자 북한 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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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 검속자들이 경찰, 헌병대 등에 의해 집단 학살된 사건.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교화·지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조직된 관변 단체였다. 국민보도연맹은 조직의 성격과 명칭, 운영 방침 등 일제가 '불량학생'을 교화하기 위해 만들었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대화...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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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1945년 8.15광복 이후 일어난 민주화 운동. 대한민국 수립 이후 발생한 일련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사회운동을 말한다.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으로는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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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장기집권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전국민적 항쟁. 4.19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집권 자유당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화로 획책한 제4대 대통령선거, 제5대 부통령선거의 부정에 맞선 광주·마산의 3.15의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세계 혁명사상 유일하게 순수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전국민 항쟁이며 시민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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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전라남도 광주시 민주당원 및 시민들이 모여 벌인 정·부통령 선거 부정행위 규탄 시위. 민주주의 장송데모는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진 것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3월 15일 전라남도 광주시 민주당원을 포함한 200여 명의 군중은 전라남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민주주의장송성명서」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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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1980년대 5월,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에 맞서 광주시민들이 '유신세력 척결', '비상계엄 철폐' 등을 외치며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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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전국에서 전개된 민주화 운동.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하여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독재·민주화 투쟁이다....
학생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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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 진행 및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여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일어난 시위. 6.3항쟁은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여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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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면서 6.3항쟁에 이어 일어난 반대 시위.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박정희 정부의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한 시위로,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1964년 6.3항쟁에 이어 1965년 3월 31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해 8월까지 시위가 계속되었으나 박정희 정부의 위수령 발동으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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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전라남도 광주시 내의 여러 학교에 배포되었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함성』지로 인해 8명이 구속되었던 사건. 1972년 유신헌법은 사실상 박정희의 1인 집권을 영구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대통령 선거 방식을 바꾸는 유신헌법의 통과를 위해 그 해 10월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각 대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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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박정희 정부의 3선개헌을 반대했던 전라남도 광주시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 1963년 12월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1회로 한정하였다. 이에 제5~6대 대통령을 연임한 박정희는 제3공화국 헌법으로는 더 이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대통령 3선을 위해 박정희는 헌법 개정에 필요한 ⅔ 의석 확보를 목적으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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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전라남도 광주시 내의 대학생들이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연행된 전남대학교 교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벌인 시위.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은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발표한 후, 곧바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로 연행되었다. 이에 전남대학교 기독학생회 및 운동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연행된 교수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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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6월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비인간적·비민주적인 교육정책과 박정희 독재체제를 합리화하는 내용을 담은 국민교육헌장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우리의 교육지표'를 선언한 사건. 박정희 정권은 1975년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 학원에 대한 억압적인 감시·통제 정책을 강화하였다. 학도호국단의 설치, 대학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새로운 학칙 제정, 교수 재임용제 등 학원 통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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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의 운구 행렬이 광주직할시 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돕기 위해 광주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에 대항해 벌인 투쟁. 운암동 투쟁은 1991년 학원 자주화 투쟁 중 진압 부대의 무차별한 폭행으로 사망한 명지대학교 강경대 열사의 운구 행렬을 광주 시내로 들여오려는 광주 시민들과 그것을 저지하려고 했던 경찰 사이에서 벌어진 대치 사건이다. 광주 시민과 경찰은 광주...
노동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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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과 신촌동 일대 금호타이어 노동조합이 임금 및 단체협약 갱신을 위해 전개한 노동쟁의. 금호타이어 파업은 1994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과 신촌동 일대 노동자들이 임금 및 단체협상을 위해 벌인 노동쟁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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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아시아자동차 광주공장 노동조합이 임금 및 단체협상 문제로 일으킨 노동쟁의. 아시아자동차 파업은 1994년 아시아자동차 광주공장의 노동자들이 임금 및 단체협상을 위해 벌인 노동쟁의이다. 아시아자동차는 1976년 기아산업[기아자동차]에서 인수하였고, 기아자동차는 1998년 현대자동차에서 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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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전남방직 광주공장 노동자들이 단체협약 체결 문제를 두고 벌인 노동쟁의. 전남방직 광주공장에서는 1960년 4.19혁명 이후 활발한 노동쟁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1950년대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근로조건 개선 등을 중심으로 노동쟁의를 전개했던 경험과 4.19혁명 이후 급증한 노동자 투쟁의 분위기가 맞물린 결과였다. 전남방직 노동조합은 1960년 6월, 1일 노동시간을...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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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월 전라남도 광주시 무등산 덕산골에 있었던 무허가 판자촌 강제 철거 과정에서 박흥숙이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사건. 1960년대 급속한 산업화·공업화는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으로 인한 도시의 인구 집중 현상을 가져왔다. 충분한 주거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도시 인구 과밀은 곧 곳곳에 무허가 판자촌을 만들어냈다. 1971년 경기도 광주군 대단지 사건은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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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이 전남대학교 김상윤, 윤한봉 등을 포함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자들을 국가 전복 혐의로 왜곡·날조하고 구속·기소하였던 공안 사건.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1972년 전남대학교 『함성』지·『고발』지 사건, 1973년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 1973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시위 등을 거치면서 전국 대학가와 지식인, 종교인, 재야인사 등으로 점차...
환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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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후 광주직할시 무등산의 환경보호를 위해 추진된 시민운동. 무등산 사랑 운동은 1989년 이후 무등산의 환경보호를 위해 추진된 시민운동이다.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무보협]를 중심으로 2021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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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의 환경보호를 위해 1990년 온천지구로 지정된 운림온천의 상업적 개발을 반대하는 시민운동. 무등산 온천개발 반대운동은 1990년 운림온천지구 지정 이후 상업적 개발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이다. 무등산 온천 개발 소식에 광주 시민들은 '무등산 운림온천개발저지 범시민연대회의'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여론이 형성되자 무등산 온천 개발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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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부터 1998년까지 '푸른광주21협의회'를 중심으로 지역 단위에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시민운동.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SD]'을 위한 행동계획으로 제시된 「의제 21」을 각국의 지방정부 차원에서 추진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대한민국은 1995년 지방자치단체의 '지속가능한...
시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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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07년까지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주민소환조례제정운동본부 주도로 이루어진 주민소환제 조례 제정운동. 주민소환 조례제정운동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광주광역시 25개 시민 단체로 구성된 광주시민단체협의회[시민협] 주민소환조례제정운동본부 주도로 이루어진 주민소환제 조례 제정운동이다....
문화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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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에 있었던 한국 주재의 미국 문화원. 광주미문화원 건물은 본래 1925년에 광주의 유일한 조선인 건축가였던 김순하가 설계한 춘목암(요리집)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 관리 하에 미군 숙소를 거쳐 광주 미국공보원이 사용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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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에 있던 1958년 건립된 800석 규모의 극장. 장인섭, 장호승, 최수열 등이 합자해서 세운 영화관으로 3000만 원의 자본금이 투자되었다. 계림극장은 건립 당시 담양과 순창 방면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계림오거리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영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2001년 휴관한 뒤, 2008년 극장의 건물 또한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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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전라남도 광주시 충장로에서 개관한 극장. 무등극장(無等劇場)이 들어선 자리는 그 이전부터 극장이 존재해 왔다. 무등극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로 나뉜다. 첫 번째는 1955년, 두 번째는 1967년이다. 1978년부터 무등극장을 인수하여 운영을 맡은 오권수 회장의 인터뷰에 근거하여 1955년부터 무등극장으로 불린 것으로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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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전라남도 광주시 충장로에 개관하였던 동아극장의 후신. 동아극장(東亞劇場)이라는 이름은 1925년 은행원 출신 최남(崔楠)이 인수한 '서울 동아부인상회'에서 비롯되었다. 최남은 사업을 확장해 나가며 전국에 체인점 형태로 점포를 열었다. 전라남도 광주시 충장로에 있던 '동아부인상회 광주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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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5가 1번지에 있던 극장. 신영극장(新映劇場)이 개관할 당시 건물은 1930년대에 지어진 창고로 사용되던 공간을 극장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평일에는 주로 영화를 상영하였고, 1950년대 중반 이후까지도 변사(辯士)가 있는 무성영화를 상영했다고 한다. 주말에는 쇼 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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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 유동에 개관한 극장. 아세아극장(亞細亞劇場)은 1968년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 유동[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유동]에 개관한 극장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 대형 가수들 초청 쇼가 1년에 평균 세 번 운영되며 극장의 흥행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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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전라남도 광주시 충장로5가에 개관한 극장. 아카데미극장은 1982년 3월 대인시장 근처 시민관(市民館)을 운영하던 백정인이 인수하여 같은 해 9월 30일 개관하였다. 당시 전라남도 광주시의 다른 극장들보다 비교적 늦게 건립되었으나, 최신 시설과 화제성 있는 개봉작을 통해 차별화 전략을 펼치며 관객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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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전라남도 광주시 삼성동에 개관하여 2012년까지 운영되었던 극장. 일제강점기 당시 제일극장(第一劇場) 자리에는 광주부립도서관이 있었다. 광복 후에는 '신성다방'이라는 시인 박용철의 아내 신정희가 운영하는 공간이 옆자리에 생겨 문인들이 자주 찾았다. 이후 극장으로 사용된 건물은 영암 출신의 사업가가 '월출상회'라는 양품점을 운영하던 곳이었다. 이를 충장로에서 잡화상점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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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동구 호남동에 있던 1957년에 건립된 극장. 태평극장(太平劇場) 대표 신성용(申成龍)은 농약 판매 사업을 했다고 한다. 신성용 등 6명이 주주로 참여하여 극장을 건립하였다. 동방극장[무등극장·무등시네마 전신], 광주극장, 신영극장[대한극장으로 개칭], 남도극장에 이어서 건립되었던 극장으로 알려진다. 2002년 5월 휴관한 뒤, 2008년에 건물이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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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에 있던 1961년에 건립된 극장. 현대극장(現代劇場) 건립자는 최승남, 최승호 형제이다. 최승남, 최승호 형제는 1950년대에 중앙극장을 임대하여 운영해 본 경험이 있었다. 또한 6.25전쟁 이전부터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소주 공장, 북구 누문동 광주제일고등학교 부근에 동천양조장, 서구 양동에 태평양조장 등을 운영하고 있었을 만큼 경영 경험이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