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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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鴻 |
이칭/별칭 | 운인(雲人),익중(翼仲)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연숙 |
[정의]
일제 강점기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민족 교육 운동가.
[개설]
송홍은 1872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광주에서 교편을 잡은 이후, 그가 학생들에게 가르친 민족의 역사와 의식은 광주학생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가계]
본관은 신평(新平), 아버지는 송용진(宋容鎭)이고, 어머니는 나주임씨이다.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창령조씨이다.
[활동 사항]
송홍은 을사조약 폐기를 요구하다 자결한 한말 애국지사인 송병선에게 수학했다. 1904년 그는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의 철회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는 활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송홍은 1904년 9월 일본 헌병대에 10일간 억류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시기 송홍은 열강의 대한제국 이권침탈 반대운동에 계속 참여하였으며, 세계 정세를 살피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 천진, 북경 등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난 그는 열강의 침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계몽운동과 교육사업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송홍은 향교를 신식학교로 개편하고, 각 도에 사범학교를 설립하여 교사를 양성하고자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송홍은 직접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1909년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광주보통학교에서 그는 한문 과목을 담당하였으나, 학생들에게 역사와 현 정세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송홍은 광주공립보통학교 외에도 광주공립농업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송홍은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전체 30여 명의 교사들 가운데 2명 뿐이었던 조선인 교사 가운데 한 명으로, 한문과 조선어를 가르쳤다. 이곳에서도 그는 담당 과목 외에 조선의 역사, 세계 정세 및 민족의 진로 등에 대해 가르쳤다. 그의 교육이념과 실천은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이후 광주학생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송홍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했을 당시 제자들이 투옥되자 병을 이유로 결근하였으며, 학생들의 제1회 공판일이었던 1930년 2월 12일 제자들에게 고별 한시를 남기고 사직했다. 사직 이후 그는 광주 서동의 자택을 고분당이라 이름짓고 독서와 서예에 전념했다.
해방 이후 송홍은 광주고등보통학교에 복직하였으며, 광주의대에서 한국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광주극장에서 결성되었던 전남문화단체연맹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건강 악화로 1949년 6월 광주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저술 및 작품]
송홍 사후 그의 저술을 모은『운인유고(雲人遺稿)』, 실용 서간문 학습 교재인 『현대신진실용서간문(現代新進實用書簡文)』 등이 있다.
[묘소]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 우산리 비나리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7년 11월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2021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운월리 굴개마을에 추모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22년 독립유공자 서훈(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