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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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畏省堂 |
영어공식명칭 | Oeseongdang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49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바른 |
건립 시기/일시 | 17세기 중반 - 외성당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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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930년대 - 외성당 철거 |
원소재지 | 외성당 -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495 |
성격 | 고택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에 있던 조선 후기 고택.
[개설]
외성당(畏省堂)은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1637~1678]가 세우고 거처하였던 곳이다. 박광후의 사후에는 아들 박중회(朴重繪)가 거처하였다. 박광후의 문집인 『안촌집(安村集)』에 외성당에 대한 시문이 실려 있으며, 최익현(崔益鉉)과 기우만(奇宇萬)이 지은 「외성당기(畏省堂記)」가 있다. 최익현은 박광후의 후손인 박만동(朴萬東)을 우연히 만나 박만동의 요청으로 당기(堂記)를 지었는데, ‘두려워하며 살피라’는 뜻의 당 이름을 빗대어 당시 서양문물 도입으로 인하여 고유의 전통이 사라지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위치]
외성당은 현재의 광산구 안청동 495 자리인 광주 안청리(安淸里)에 있었다고 전한다.
[변천]
외성당은 박광후가 건립하고 거처하였다고 전한다. 박광후의 스승 송시열이 쓴 ‘외성당’이라는 글씨가 현액되었으나 지금은 없다. 1930년대에 철거된 후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황]
외성당은 지금은 터만 남아 있어 옛 모습을 볼 수 없으며, 은행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의의와 평가]
외성당은 비록 철거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으나, 조선 후기 광주를 대표하는 문인 박광후가 거처하였던 곳으로 의미가 있다. 또한 송시열 및 송주석, 박광일, 기정진, 최익현, 기우만 등 조선 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문인·학자들이 외성당에 차운한 시가 전하는 교류의 공간으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