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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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祿永 |
영어공식명칭 | Gim Nokyeong |
이칭/별칭 | 백우(白愚)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924년 12월 8일 - 김녹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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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71년 - 김녹영 8대 국회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73년 - 김녹영 9대 국회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78년 - 김녹영 10대 국회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85년 - 김녹영 12대 국회의원 당선 |
몰년 시기/일시 | 1985년 7월 10일 - 김녹영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5년 - 김녹영 12대 국회부의장으로 선출 |
출생지 | 김녹영 출생지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물메마을 |
학교|수학지 |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 서울특별시 성북구 |
학교|수학지 |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 광주광역시 북구 |
활동지 | 언론인[목포일보 광주분실장] - 전라남도 목포시 |
활동지 | 제8·9·10·12대 국회의원 - 전남·광주 |
묘소 | 망월동 5.18 민주묘역 - 광주광역시 북구 |
성격 | 언론인|정치인 |
성별 | 남 |
본관 | 울산(蔚山) |
대표 경력 | 제12대 국회부의장 |
[정의]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자, 공무원, 사회운동가.
[개설]
1952년 목포일보에서 언론인으로 근무하였고, 1956년 민주당 입당으로 정계에 발을 내딛어 1971년~1988년까지 제8대·제9대·제10대·제12대 4선 국회의원 당선 및 제12대 국회부의장직을 지냈다.
[가계]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백우(白愚). 1924년 12월 8일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물메마을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녹영은 1949년 2월 13일 대한청년단 조직부장으로 선정되었으며, 통합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49년 8월 8일 YWCA에서 한청 집행위원 회의를 개최하였다. 1952년 목포일보 광주분실장으로 근무하였다.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전남도당의 총무 조직 선전부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상임위원 겸 전라남도 장성지구당 위원장을 지냈으며, 1960년 전라남도 제3대 전남도도의원[신민당 총무]을 역임하였다.
1960년 4·19혁명동지회 지도위원을 역임하였고,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군사 연장 반대 투쟁을 하다가 광주교도소에 옥고를 치렀다. 광주시 을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입후보 하였다가 낙선하였다. 신민당 중앙당무위원, 전남도당 부위원장, 광주 을구 당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위원회 전라남도선전분과위원장을 맡아 분투하였다. 신민당 창당으로 전남도당 부위원장 겸 광주시 을구 당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 국민투쟁위원회 전남선전위원장을 맡았다. 1971년 광주시 을구 일원 제8대 국회의원[1971. 7. 1.~1972. 10. 17.] 선거에 신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공화당의 김남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1973년 유진산의 노선에 반발하여 민주통일당에 입당하여 민주통일당 대변인을, 이듬해에는 정책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3년의 광주가 하나의 선거구로 통합되어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명의 국회의원을 동시에 선출하게 되었다. 광주시 제1선거구 일원 제9대 국회의원[1973. 3. 12.~1979. 3. 11.] 선거에 민주통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박철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민주통일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일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이필선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민주통일당 부총재가 되었다. 1980년 5.17 내란 직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80년 8월 14일 시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기소되었고, 1981년 3월 25일 치러진 제11대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 1984년 5월 18일 김영삼을 비롯한 정치 활동이 금지된 야당 정치인이 모여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협]를 구성하였고, 김녹영은 민추협에서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4년 11월 30일 「3차 정치피규제법」에서 해금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하였고,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대회에서 5명의 부총재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영일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리고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1985. 5. 13.~1987. 5. 12.]이 되었다. 김녹영의 정치 활동은 민주주의 수호와 반독재 투쟁으로 일관하였으며,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지병으로 1985년 7월 10일 별세하였다.
[묘소]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5.18 민주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4.19 혁명 부상자로 수훈되었으며, 1985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