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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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현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18년 - 「절이 없어진 이유」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거주하는 고숙현의 이야기를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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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지 | 절골마을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
성격 | 설화|지명전설|폐사담 |
주요 등장 인물 | 박순|박상 |
모티프 유형 | 조선 사대부의 위세로 절이 없어짐. |
[정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절골마을 지명과 절의 폐사에 관한 이야기.
[개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의 지명 유래와 절이 폐사(廢寺)된 이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2018년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거주하는 고숙현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에 수록되었다.
[내용]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절골마을이 있다. 절골마을은 과거에 골짜기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절골마을은 조선 전기에는 충주박씨(忠州朴氏)들이 살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사암(思庵) 박순(朴淳)[1523~1589]과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이 있다. 박순은 조선 초기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박상은 담양부사와 나주목사 등을 지낸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충주박씨 집안이 절골에 들어오면서 골짜기에 있던 절이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유학자들의 불교 배척이 심했다. 조선 초기와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집안인 충주박씨 일가들이 절골에 들어오면서 중들이 절을 떠난 것이다.
[모티프 분석]
「절이 없어진 이유」는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의 지명유래와 절이 사라진 이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골짜기에 절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절골이라 불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호남의 대표적인 유학자 집안인 충주박씨가 절골마을로 들어오고, 조선의 강력한 억불숭유 정책이 시행되면서 절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