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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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農樂-上-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8년 - 광산농악대 창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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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2년 3월 16일 -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광산농악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5년 7월 - 광산농악보존회 사단법인 취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9년 12월 29일 - 설북 예능 보유자 서창순 사망[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해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0년 3월 14일 - 설장고 예능 보유자 김종회 사망[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해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8월 14일 - 상쇠 예능 보유자 정득채 사망[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해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0년 10월 29일 - 광산농악전수교육관 개관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전승되는 농악.
[개설]
광산농악(光山農樂)은 지역적으로는 호남우도농악(湖南右道農樂)에 속하며, 전라남도 서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발달한 농악이다. 광산농악에는 마을 농악의 농악과 뜬쇠들이 형성한 판굿 농악의 두 가지 계열이 있다. 현재의 광산농악은 광주광역시 서구 마륵동의 판굿 농악을 중심으로 칠석동의 고싸움놀이 농악과 소촌동의 당산농악, 산월동의 풍장농악 등 광산 지역에서 연주되는 다양한 농악을 집대성한 것이다. 광산구 일대에서 전래하여 온 광산농악은 옛날부터 정월 대보름에 마을마다 집집을 돌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연행하였던 마을굿이었다.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마을 제사인 당산굿을 벌이고, 이어 집집이 돌아다니며 마당밟이[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영남에서 행해져 온 민속놀이의 하나]를 하였다. 현재는 판굿 위주로 전승되고 있다.
광산농악은 농촌의 도시화로 인하여 맥이 거의 끊어졌던 것을 마륵동 원로들의 증언과 전남대학교 지춘상(池春相)[1931~2009] 교수의 고증 등으로 인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0년 제3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농악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1992년 3월 16일에는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전통 농악의 전승과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광산농악을 전승해 온 상쇠 정득채(鄭得采)[1939~2021], 설장고 김종회(金宗會)[1918~2000] 및 설북 서창순(徐昌淳)[1916~1999] 등을 발굴하여 예능 보유자로 지정, 이들에 의해 옛 형태가 거의 재현되었다.
[광산농악의 내용과 구성]
광산농악의 편제는 앞치배와 뒤치배로 나누어진다. 앞치배는 농기·영기·상쇠·부쇠·종쇠·설장고·부장구·설쟁·부쟁·통북·설북·부북·소고·나팔수·쇄납수 등으로 20여 명 이상이고, 뒤치배는 대포수·양반·할미·조리중·각시·참봉·비리쇠·홍작삼·좌창·우창 등 10여 명으로 구성되나, 행사 규모에 따라 증감이 있다. 앞치배의 우두머리는 상쇠이고 뒷치배의 우두머리는 대포수이다.
광산농악은 문굿-당산굿-철용굿-샘굿-들당산굿-마당밟이-날당산굿-판굿의 8개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정마다 가락과 형태는 다르지만, 모든 연행이 추구하는 공동체 삶의 두레놀이는 액을 막고 복을 빌어주는 형태로 되어 있다. 먼저 문굿으로 마을에 들어와서 마을을 지키는 당산신과 철용신에게 농악대가 왔음을 알리고, 마을의 우물신을 달랜다. 다음으로 들당산굿으로, 마을의 집집이 방문하여 마당밟이를 하고, 날당산굿으로 마을을 떠날 때 별도로 날을 잡아 걸립(乞粒)에 대한 고마움을 판굿으로 표시한다. 이러한 구성은 전통사회의 마을굿 전통과 좀 더 전문적인 걸립굿의 전통이 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굿과 당산굿·철용굿·샘굿·마당밟이·판굿의 구조는 서로 유사하다. 그러나 문굿과 판굿의 경우 의례보다는 연희 중심의 굿거리이며, 이외 다른 굿거리들은 의례적 절차가 있는 굿거리라는 차이점이 있다.
광산농악은 판굿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판굿은 인사굿-오채질굿-된오채질굿-늦은일채굿-벙어리삼채-벙어리일채-된삼채-음매깽-잦은일채-오방진-구정놀이-허허굿-좌우진퇴-지신매기-지신밟기-콩등지기-용틀임-개인놀이[잡색·소고·북·쇠·장구]-헛튼굿 등 모두 19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굿은 농악대원들의 개인 기량을 한데 묶어 별도로 구성한 농악의 한 과정이다. 판굿은 마당밟이에서 많은 걸립을 해 주었던 마을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행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의례에 치중하느라 연행하지 못하였던 가락과 진법 중에서 잘 짜인 부분을 뽑아 새로 구성한 것이다. 판굿은 주로 걸립농악이 끝난 후에 따로 날을 잡아 행하지만, 마을의 화합을 목적으로 판굿만으로 별도로 연행하기도 한다. 또 정월 보름날이나 8월 한가위, 추수를 끝낸 후에도 행해진다.
[광산농악보존회의 구성]
1990년 8월에 광산농악단을 설립하고, 1995년 7월 29일 광산농악보존회를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여 운영하고 있다. 2021년 현재 50여 명의 보존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광산농악보존회의 운영 조직은 이사장, 수석 이사, 감사, 이사, 고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산농악보존회의 편제는 깃발 2명, 태평소 2명, 쇠 6명, 징 3명, 장구 9명, 북 8명, 소고 13명, 잡색 9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유자의 입문 동기와 생애]
광산농악의 상쇠 정득채는 1939년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농악을 좋아해서 매년 정월이 되면 온종일 마을 농악대를 흉내 내며 따라다녔다. 이를 지켜본 마을 농악대의 상쇠 정동을이 쇠가락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여 꽹과리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광주사범병설중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농악대의 상쇠를 맡아 활약하였고, 방학 중에는 고향에서 정동을에게 쇠가락을 배웠다.
결혼 후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악에 대한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던 정득채는 1963년 25세가 되던 해에 소문을 듣고 전라남도 장성의 상쇠 유흠선을 찾아갔다. 유흠선에게 쇠가락 몇 가락을 선보였으나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몇 달 후 유흠선에게 연락이 왔고, 유흠선의 바로 뒤에서 쇠를 치면서 그의 가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쇠가락을 배우는 과정은 요즘의 교육 방식과는 달리 일정한 틀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농악은 현장에서 따라 치면서 몸으로 익히는 방법이 최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5년을 함평과 장성을 오가며 쇠를 배우다가 광주로 이사하면서 유흠선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광주로 건너와서는 목수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1974년에는 제주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느 날 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농악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서 구경하던 중 정득채는 농악대 무리에 끼어 한번 연주해 보았다가 농악대의 대원이 되었다. 정득채는 농악대의 대원으로 ‘한라문화제’에 출전하여 개인상을 받았다. 1980년에는 다시 광주로 돌아와서 광주고속의 운전원으로 근무하였다. 이곳에서 동료 직원들과 함께 ‘광주고속 농악대’를 조직하여 상쇠를 맡았다. 1986년 어느 날에는 출근하다가 광주공원에서 한 무리의 농악대가 농악을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 출근하는 것도 잊고 농악을 구경하다가 상쇠 전경환과 설장고 김오채를 만나게 되었다. 이날부터 전경환 상쇠의 제자가 되었고, 근무가 없는 날이면 전라남도 영광으로 가서 가락을 배웠다.
정득채는 전경환이 비디오로 촬영한 연주 장면을 보면서 전경환의 가락을 학습하였다. 그렇게 지내다가 광주고속을 그만두고 호남우도농악 영광보존회의 이사가 되면서 전문 농악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에는 스승 전경환을 따라 제2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광주직할시 대표로 출전하기 위해 광산농악대를 조직하는 일원이 되었다. 이를 위해 극락교 밑에서 연습하면서 전경환의 구술과 전남대학교 지춘상 교수의 고증을 통해 광산농악을 재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광산농악대는 입상하기 시작하였다. 정득채도 1991년부터 광산농악대의 상쇠를 맡으며 광산농악의 보급에 힘썼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92년에 54세의 젊은 나이로 설장고의 김종회와 설북의 서창순과 함께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광산농악 예능 보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정득채 상쇠의 경우 우도농악 상쇠의 기능이 확실하다는 점, 농악대를 이끌어가는 지휘 능력이 있다는 점, 광산농악 가락을 다채롭게 연주할 수 있다는 점, 당산제와 지신밟기, 진풀이 등을 잘 이끌어 간다는 점, 농악대 기물과 악기채 제작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후학 양성을 위한 다양한 교수법으로 농악을 전수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광산농악 예능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예능 보유자로 인정된 이후에는 국악 강사로도 활동하고 타 지역의 농악 단체와 교류도 하며 광산농악을 널리 알리는 데 큰 노력을 하였다. 광산농악보존회도 창단하여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보유 단체로 육성하였고, 전수 교육을 진행하면서 많은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설장고의 김종회는 1918년 담양군 무정면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영광의 김만석에게 사사하며 설장고에 입문하였다. 이후 나주의 강성수, 광주의 최막동에게 설장고를 전수(傳受)하였다. 이후 임방울극단과 여성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전라북도 임실필봉농악에서 상쇠로도 활동하였다. 1988년에는 광산소촌농악의 설장고로 참여하였다. 이후에도 광산농악의 설장고로 참여하였고, 1992년에는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광산농악 설장고로 인정되었다. 2000년에 사망하면서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에서 해제되었다.
설북의 서창순은 1916년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농악대를 따라다니다가 마을 농악대의 막내 단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본격적으로 농악에 입문한 것은 15세에 진안의 김복만에게서 통북과 농악 걸립패 설북을 사사한 이후이다. 그다음에는 고창의 김홍식과 영광의 김성락에게서 북 놀음을 배웠다. 결혼 이후에는 농악 활동에 전념하지 못하다가 1960년 45세 즈음에 함평의 천학실에게서 소리북을 배우며 자신의 고법을 다듬어갔다. 55세에는 영광의 전경환과 함께 영광농악대에 설북수로 참여하였다. 1988년에는 광산농악대의 설북수로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77세에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광산농악 설북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99년에 사망하면서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에서 해제되었다.
[보유자의 전승 계보]
정득채는 13세에 함평군 월야면의 상쇠 정동을에게 입문하여 꽹과리를 학습하였다. 16세에는 최화집의 제자인 노창덕 밑에서 학습하였다. 25~30세에는 전라남도 장성의 유흠선에게서 상쇠 기능을 전수하였다. 48~53세에는 전경환[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 예능 보유자)·전경석 형제에게서 농악 진법과 가락, 당산제 굿 가락, 마당밟이 등을 사사하였다. 이후 남도문화재,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종쇠·부쇠·상쇠 등으로 출연하였다. 2021년 현재 광산농악 상쇠의 전수자는 전수 교육 조교 1명과 이수자 12명, 전수 장학생 3명이 있다.
[전수 교육 현황]
광산농악은 1992년에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제대로 된 연습장이 없이 장덕동 근대 한옥을 빌려 전수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마저도 인근 주민들의 민원으로 인해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그러다가 2020년 10월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 가야제 옆에 광산농악전수교육관을 개관하여 광산농악 전수장, 지역주민의 교육 및 문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수 교육 활동의 경우 이수자들은 지정된 날짜 없이 자유로이 연습하며, 전수 장학생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에 연습한다. 일반 시민과 동호인들에게도 전수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꽹과리·장구·북·소고·고사덕담·잡색놀이 등을 교육하고 있다. 2014~2019년까지 약 400여 명에게 광산농악을 전수하였다.
현재 꽹과리 전수자는 전수 교육 조교 1명, 이수자 12명, 전수 장학생 3명이고, 장구 이수자 4명, 전수 장학생 2명, 북 이수자 2명, 전수 장학생 1명이 있다.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에는 상쇠와 설북, 설장고 보유자가 함께 인정되었으나, 설북 보유자인 서창순과 설장고 보유자인 김종회가 사망한 이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전수 교육 비용은 광주광역시에 지급하는 지원금을 통해 충당하고 있다. 시도무형문화재 보유자 및 보유 단체는 매년 1회 이상의 공개 발표회를 진행해야 한다. 광산농악보존회 역시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매년 정기발표회를 진행하고 있다.
[광산농악의 특징]
광산농악은 호남우도농악에 속하며, 전통적인 우도농악의 구성 형식이 남아있다. 또 좌도농악에 비해 가락이 흥겨우며,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굿 과정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쉽다. 그리고 다양한 기교와 진법이 전통적인 형태로 남아있으며, 잡색 구성에는 조직적이며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굿 가락의 변화가 많고 설장고와 같은 개인놀이가 발달하여 유연하고 흥겨우며 구성지다. 반면, 진법의 기교보다는 다양한 가락과 춤사위로 흥을 돋우는 등 호남우도농악의 특징이 있다. 판굿의 예술성은 오채질굿·도둑잽이굿·미지기굿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잡색들의 재담과 연극으로 구성된 도둑잽이굿은 음악적 요소뿐만 아니라, 연극적 요소를 잘 보여주고 있어 종합예술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판굿은 농악을 연주하는 예능인들에게는 자신의 기예를 숨김없이 발휘할 수 있는 과정이고, 청중에게는 예능인들이 펼치는 다양한 기예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