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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 만드리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의 마음이 있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90
한자 西倉-豐年-祈願-農夫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옥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9년 8월 1일 - 발산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복원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0년 8월 14일 - 발산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1년 8월 4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8월 2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7월 31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 7월 29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5년 7월 29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6년 8월 3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7월 30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8년 7월 31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6월 12일 - 한국민속예술축제 광주시 예선대회에서 대상 수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7월 21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7월 30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10월 11일 - 제51회 한국민속예술축제 공주대회에서 장려상 수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6월 3일 - 한국민속예술 축제 예선 광주대회에서 대상 수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7월 29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9월 27일 - 한국민속예술 축제 예선 광주대회에서 대상 수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2년 7월 26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2년 10월 14일 - 서창 만드리 풍년제 제53회 한국민속예술축제 김천대회에서 동상 수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3년 7월 25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4년 7월 31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7월 28일 - 서창동 발산마을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6년 7월 29일 - 서창동 발산마을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7년 7월 27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8년 7월 26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9년 7월 19일 - 세하동 마을 앞 들녘에서 만드리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5월 - 서창만드리풍년제 한국민속예술제 제23회 시 예선 대상 수상

[정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들노래 축제.

[개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는 1999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전통 농경문화인 만드리를 주제로 한 마을 축제가 열리고 있다. 1970년대까지 서창 들녘에는 들노래가 울려 퍼졌지만, 농촌 인구 감소와 기계 영농으로 인해 들노래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1999년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서창만드리풍년제를 복원한 후 현재까지 전승이 이어지고 있다. 만드리[‘만도리’의 방언]는 7월 백중[음력 7월 15일] 무렵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면서 마지막으로 김매기를 재현하는 행사이다. 2009년과 2011년, 2019년, 2020년 광주광역시 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하였으며, 2010년과 2012년에는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였다. 처음에는 서창동 발산마을 주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마을 축제였지만, 점차 광주광역시를 대표하는 지역 축제로 확장되고 있다.

[영산강을 지척에 둔 비옥한 서창 들녘]

서창동 일대는 황룡강극락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하며 농경에 적합한 비옥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다. 서창은 조선시대 광주 고을에서 서쪽을 상징하는 땅 이름이었다. 광주 고을의 북쪽 30리인 천곡(泉谷)[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동창이 있었으며, 서창동에는 서창이 있었다. 이 두 창고는 고을 백성에게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을 모아 두었다가 영산포조창이나 법성창으로 보냈던 광주 고을의 세곡 창고였다. 동창과 서창은 영산강 변에 있어 뱃길로 국가 창고에 옮기기 수월하였다. 당시 창고가 있던 곳은 서창동 산4번지 일대였는데, 지금도 이곳을 ‘창고등’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과거 세곡 창고의 주춧돌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는 호박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자연 지리적 조건과 인문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서창 지역에서는 영산강 상류의 농업문화의 전통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농사를 지으면서 불렀던 들노래가 전승되고 있고, 들노래를 주제로 한 마을 축제가 열리고 있다. 농촌의 환경은 예전과 달라졌지만, 서창만드리풍년제를 통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적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벼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들노래]

한낮의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날, 광주시 서구 서창동 들녘에서는 벼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들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논 한쪽에는 ‘농자천하지대본’을 새긴 농기가 든든하게 세워져 있고, 낟알이 올라온 볏논에서는 서창 만드리의 특색을 담은 지화(紙花)가 나부끼고 농악이 울리는 가운데 농군들의 김매기가 재현되었다.

“시집살이만 힘들단가, 초벌매기도 힘이 드네.”

앞소리가 진행되는 동안 허리를 굽히고 논을 매던 농군들은 “오오호~ 오 아해 해에헤에~루 사~ 아 아하아 디여~” 뒷소리를 받으며 잠시 허리를 펴고 땀을 닦았다.

서창 만드리에서 연행되는 서창 들노래는 ‘모 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초벌매기소리, 두벌매기소리, 만드리소리, 장원질소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과 함께 건강한 웃음이 피어올랐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벼도 한층 생기 있게 포기를 세운다. 논두렁에는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지켜보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이다.

들노래는 논이나 밭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농요(農謠)라고도 한다.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벼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는 모 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김매는 소리 등을 들노래로 일컫는다. 벼농사는 논갈이, 볍씨 담그기, 볍씨 뿌리기, 못자리 만들기, 모 찌기, 모심기, 논매기, 벼 베기, 탈곡하기 등의 농사 절차를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 나간다. 논갈이, 볍씨 뿌리기 등 일부 절차는 가족끼리도 해결할 수 있지만, 모심기, 논매기 등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돕지 않으면 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일의 효율도 떨어지게 된다. 함께 모여 일하면 능률도 오를 뿐 아니라 힘든 줄도 모르고 일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일하면서 농악기를 다루며 들소리를 부르면 동작의 일치를 가져와 작업의 능률이 높아지고 힘든 노동도 감내할 힘이 생겨나곤 하였다.

들소리와 농악은 일하는 농군들에게만 유용하였던 것이 아니라, 들소리와 농악 소리를 듣는 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두레를 한 논에는 벼멸구가 생기지 않는다”는 구술이나 “두레를 한 논의 벼 수확이 훨씬 높다”는 구술은 최근의 여러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식물도 좋은 음악을 들으면 생장이 훨씬 좋아진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논매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농사를 잘 지은 부농들이 머슴의 노고를 위로하고 마을 주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하여 고기와 술 등을 제공하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만드리’는 농촌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서창 만드리를 복원하기까지]

서창 들녘에서 만드리가 사라진 지 20여 년이 지난 후인 1999년 여름, 모정에 앉아 만드리를 하며 즐거웠던 젊은 날의 추억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어른들의 제안으로 만드리를 복원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 만드리를 복원하던 때의 일을 이야기할 때면 다들 말소리에 활기가 넘쳐난다.

“처음에, 그날이 칠월 백중이여. 요즘 사람들은 칠월 백중하면 뭔 날인가 할 것인디, 칠월 백중이 뭐인고 하면 나락 다 키워놓고 한가하니 놀 때여. 술 한 잔씩 먹고. 그때 시정이 저가 있었어. 지금 컨테이너 있는디. 그때 어른들이, 문장백 씨, 김인주 씨, 배삼권 씨, 정종섭 씨 그분들이 시정에 앉어 놀다가 ‘무단히 앉거서 노느니 만드리소리나 한번 하세.’ 그렇게 해서 시작된 거여. 노래 부르고 걸궁 치고 춤도 치고 그랬제.” [마을 주민]

발산마을 모정에서 젊은 날의 기억을 되살려 시작된 서창 만드리는 처음에는 발산마을 주민들의 잔치였다가 중촌, 서창 마을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서창동의 축제로 확대되었고, 서구의 여러 마을이 참여해서 축제를 즐기는 서구를 대표하는 지역 축제로 확대되었다.

지역 축제로 확대되면서 광산농악팀, 서창농협풍물패, 치평동풍물패가 지원군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광산농악단 단원이자 지역의 소리꾼인 정영을이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앞소리를 맡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9년에 광주에서 열린 한국민속예술축제 예선인 광주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으면서 서창 만드리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제한된 공간에서 40분간 연행’이라는 정해진 틀을 갖춘 한국민속예술축제 방식에 맞게 재편되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당시 남구문화원장을 맡고 있던 이종일이 연출 지도를 맡고 문화재 위원을 맡고 있던 강형구도 직간접적으로 연출에 참여하였으며,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교수인 이윤선이 고증을 담당하였다. 더위도 피하고 소음도 피할 수 있는 마을 인근 다리 밑에 모여 날마다 몇 시간씩 서로 의논하고 연습하였다. 당시 대회를 준비하면서 서창 만드리는 「초벌매기소리-긴소리」, 「두벌매기소리-산아지소리」, 「만드리소리」, 「장원질소리-아롱저롱」 등으로 곡이 구성되었다. 앞소리는 ‘소리 놀이’의 대표로서 서창만드리풍년제에 참여해 온 김용철이 담당하였다.

2010년 10월 10일부터 11일까지 충청남도 공주시 곰나루 야외무대에서 개최된 제51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하여 장려상을 받게 된 계기로 서창 만드리의 문화적 의미 부여가 커지고 보존의 중요성이 더 높아지게 된다. 2011년 9월 27일 제9회 광주 충장축제 개막식 퍼레이드에도 참여하는 등 광주광역시를 대표하는 민속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서창 만드리는 2011년 광주광역시 민속예술축제에서 대상을 받고 제53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참가 자격을 얻은 후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때는 최종민 교수가 고증 위원을 맡았고,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김삼진 단장이 연출 지도를 맡게 된다. 김삼진 단장은 이전 연출 지도를 맡았던 이종일과 윤명규 서창 만드리 보존회장, 김용철 선소리꾼과 상의를 거쳐 서창 만드리의 레퍼토리에 변화를 주게 된다.

만드리를 하려면 논매기 과정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모 찌기, 모심기의 과정도 수반되므로 그 소리도 포함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두벌매기소리로 채택된 「산아지소리」는 영산강 유역권의 논매기소리라기보다는 섬진강 유역의 논매기소리이므로 이쪽 지역에서 전승되던 소리로 변경하자는 결론이었다. 레퍼토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과의 불협화음도 있었다고 한다. 복원 이후에 해 왔던 레퍼토리 외에 모 찌기, 모심기 등을 추가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하지만 만드리는 결국 논농사의 일환에서 행해지는 것이고, 만드리를 하려면 모 찌기, 모심기 등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용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2012년 제53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하여 동상을 수상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매기 노래들이 재구성되고 농요의 선소리꾼이 교체되는 변화를 겪기도 하였지만, 현대화된 도시 농촌이라는 환경에서 서창 만드리를 보존하고 전승해 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창 만드리를 지켜가는 사람들]

문장백·배삼권·정종섭·김인주 등 마을의 원로들을 중심으로 서창 만드리가 복원되었을 당시에는 따로 조직을 구성하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준비하고 즐기는 자발적인 마을 축제였기 때문이다.

복원 초기에 만드리 행사를 하려면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이흥수·최순호 등이 장보기를 하는 등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흥수는 전라남도 장흥 출신 공무원으로, 발산마을에 정착한 지는 30여 년 정도 되었다. 오토바이가 있어 장보기 등이 수월하였고, 공직 경험이 총무 역할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최순호도 복원 사업에서 무척 고생하였는데, 세상을 떠나 마을 사람들은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서창 만드리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이 이어지면서 점차 마을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었다. 2007년부터는 서구청장이 농주 역할을 맡아 소를 타고 농군들을 위로하는 절차를 마련하였다. 서구청, 서창농협, 광산농악, 서구치평농악 등 여러 단체가 결합하게 되면서 서창 만드리는 지역 축제로 확대되었고, 마을에서도 지속적인 보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2008년 3월 ‘서창만드리보존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보존회는 발산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서창·중촌 마을 사람들을 포함하여 50여 명으로 위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김덕수 초대 위원장 이후 윤명규를 거쳐 2021년 현재 정병철이 보존회장을 맡고 있다.

서창만드리보존회는 2010년 마을 입구에 ‘서창동 발산 만드리 보존 마을’이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또한, 매년 개최하는 서창만드리풍년제의 일시와 행사 내용 등을 논의하고 행사를 치르는 데 문제없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서구를 대표하는 지역 축제, 서창 만드리]

서창만드리풍년제광주광역시 서구를 대표하는 지역 축제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매년 처음 만드리 행사를 복원한 서창동 발산마을과 인근의 세동마을 일대에서 번갈아 가며 서창 만드리 축제가 열리고 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소규모 축제였으나, 이 자리에 서구의 각계 기관장이 참여함으로써 공식적인 성격의 축제로 확장되었다.

서창 들녘에서 들노래를 부르는 만드리 행사가 이 축제의 핵심이다. 만드리 재현이 끝난 후 행사장에서는 구민이 다 함께 즐기는 축제 한마당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난타·국악·판소리·대중가요 등 지역 예술인들의 수준 높은 공연이 펼쳐지고 전통 탈 및 부채 만들기, 천연 염색 시연, 모형 소 타기, 추억의 농촌 풍경 전시 등 다채로운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체험 부스도 설치·운영되었다. 또한, 사진 촬영 대회를 열어 시민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인근에 자리한 어린이집의 아이들이 참여하여 반짝이는 눈으로 논에서 김매기를 재현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이주민 여성들이 참여하는 행사도 개최된다. 전통적인 노동 공동체의 잔치에서 마을 공동체의 축제로 변화되었고, 지금은 지역민이 함께 소통하는 지역 축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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