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한국의 피카소 양수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48
한자 韓國-梁秀雅
이칭/별칭 양지하,한국의 피카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허경

[정의]

'한국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근현대 시기의 화가로서 추상미술의 선구자.

[개설]

양수아(梁秀雅)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분명한 해석과 정당한 평가가 유보돼 있던 한국 앵포르멜(informel) 태동에 관한 시차의 공백을 메워 주었으며, 한국 앵포르멜의 근원적·역사적 가치에 근접할 수 있는 좌표의 지점에서 활약한 예술가이다.

[비정형 회화의 시도]

양수아의 나이 12세였던 1931년 일본 시모노세끼[下關]로 건너가 공립중학교를 거쳐 1939년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 진학하였다. 당시 삽화가 미야모토 사부로[官本三郞] 문하에 들어갔던 양수아는 일본 필명으로 여러 잡지와 출판물에 삽화를 그렸다. 가와바타화학교를 졸업한 1년 후에는 도쿄[東京] 긴자[銀座] 국옥(菊屋)화랑에서 「신창생파창립전(新創生派創立展)」[1940년]을 개최하였고, 「백어회전(伯漁會展)」[1941년]에도 참가하였다.

20대 청년기에는 태평양 전쟁의 징용을 피해 중국 베이징[北京]과 만주(滿洲) 안동(安東)으로 이동하면서 근대 격동기라는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당시 만주는 만주 사변(滿洲事變)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최전선으로 항일 무장투쟁의 근거지였다. 광복을 맞아 전라남도 광주 지역으로 돌아온 양수아는 1948년부터 목포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광주 미국공보원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목포와 광주를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광주 미국공보원은 1947년 개관 다음 해인 1948년 중국계 미국인 화가 「동경문(董景文) 초청전」을 가졌는데, 이때 김보현의 구상 작품은 물론 강용운, 양수아의 비구상 작품이 함께 찬조 출품되었다. 당시 한국일보 광주 주재기자이자 시인이었던 위증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인 화가 동경문[동킹맨] 씨의 광주 환영 전시회이다. 그때 강용운 화백과 더불어 비구상화를 내놓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앵포르멜의 첫 시도였으며 지방 화단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양수아강용운이 비정형 회화를 시도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느낌으로서의 회화]

1947년부터 1956년 광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목포사범학교, 문태고등학교, 목포여자고등학교에 재직하며 창작활동을 하였다. 6.25전쟁 직후에는 '양수아 양화연구소[1953년]'를 개설하여 11월 15일 제1회 전시회를 여는 등 제자들과 다수의 문하생들을 양성하고 교육하였다. 일본 유학을 통해 전위적 모더니즘 미술을 경험한 양수아는 광복 이후 개인적인 실험 단계에 접어들면서 추상으로 변이를 탐색하였다. 1940년대 말 목포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모리배」, 「불만」등의 드로잉 작품들은 구상적 회화를 탈피하여 비정형의 새로운 조형기법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후 목포와 광주를 오가며 개인전을 여는 등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실험적인 탐구를 지속하였다.

양수아가 시도한 '사실로서의 회화가 아닌 느낌으로서의 회화'란 추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1940년대 말 작품의 제목과 표현 형식에서 자유로운 사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양수아를 기억하는 이석우는 "사실 구상화도 나름대로의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음에도 그는 구상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곳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는 내면의 소리를 거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양수아는 이를 두고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의 갈등, 현실과 이상 사이의 비좁고도 넓은 격차,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그 격차를 포착해 보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1940년대 말로 추정되는 양수아의 「불만」, 「따진다·질투」등은 인간의 감정을 대입시킨 명제들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들은 간략한 선묘의 표현을 통해 인물의 표정이나 성격, 감정을 포착해 낸 것으로 대상에 대한 탁월한 직관력을 느끼게 한다. 세부적인 묘출(描出)을 대담하게 생략한 작품들은 인간의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을 추상화한 것들로 양수아가 추상의 방법적 단서를 어디에서 찾고 있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이지적 사고를 넘어서 우연적인 효과와 느낌만으로 '추상의 과정', 그 자체를 재현함으로써 대상을 새롭게 탐구한 것이다.

근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경험한 양수아는 추상에 이르는 과정을 캔버스 위에 남겨 놓음으로써 추상이 곧 현실에 부딪힌 인간의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달리 말하면 양수아가 시도한 추상은 구상으로부터 오랜 기간 숙성되어 온 과정을 경유해야만 구현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양수아에게 회화의 주제는 그리는 행위와 그 행위의 창조적 자유로움의 표현이었으며, 이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 즉 마음의 경쾌, 화, 억압 등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정신의 자율성을 의미하였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카타르시스적 개념으로 해석하자면, 격정적인 표현을 표출함으로써 화가는 고통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로움이라는 정신적 정화에 도달하게 된다.

드로잉 작품인 「사랑」은 흰색과 빨간색 크레파스 질감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지는 색감 표현을 통해 분홍빛으로 물든 아련한 사랑을 담고 있다. 양수아가 순간적으로 재빠르게 그어 나간 검은색 필선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상기시킨다. 이 외에도 「그리움/내 아들 음악교실」은 자발적인 손의 움직임으로 추상의 조형의식을 이끌어냈다.

[시대의 격동 속으로]

양수아는 광복과 함께 새로운 의식의 발현을 시도하며 의욕적인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치적 불안과 좌우익 대립을 체험하면서 이데올로기 분쟁에 휘말려 혼돈의 시기에 빠져들고 만다. 이 같은 상황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좌우 대립의 현상이 극도로 표면화된 까닭에 반공과 구국이라는 이념 아래 벌어진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전쟁 국면은 남과 북이 서로 밀고 밀리는 상황에서 미술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의 반영과 상관없이 진척되었다.

전쟁 와중에 미술가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강제적 동원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는 인민군 점령기였던 1950년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종군 화가라는 군인 신분으로 전쟁을 기록하는 조직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자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남과 북 어느 소속이든 간에 유격대원으로 활동했으며 휴전 이후에는 남과 북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였다.

양수아의 활동을 추적해 보면, 광복 후 광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동생 양회천이 미군정기인 1948년 제주 4.3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면서 양수아의 삶은 격동기를 맞게 된다. 1950년 7월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동생이 퇴각하던 국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양수아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이후 1951년 좌우익 대립이 심해지자 목포 지역 문화예술동맹의 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하던 양수아는 쫓기듯 지리산에 입산한다. 양수아는 이현상 부대 81사단 정치부로 차출되어 문화공작대로 활동하였다. 정치부대에 소속된 양수아는 배낭 안에 종이와 물감을 가지고 다니면서 낮에는 포스터나 부대원들의 모습을 그렸고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

훗날 양수아는 이태의 빨치산 수기 『남부군』[1988년]에서 '양지하'라는 화가로 등장하게 된다. 실제로 양수아는 지리산 빨치산 핵심부대인 이현상 부대의 정치부 소속 종군 화가로서 저자인 이태, 작가 이동규, 시인 이명재 등과 함께 문화공작을 맡았었다. 책의 내용에서 양수아는 유머가 풍부하고 인간적이며, 쫓기는 산중생활에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던 화가 '양지하'로 설명되었다. 이태와 양수아는 1951년에 만나 1952년 3월 초순 지리산 백우동 골짜기에서 부대가 흩어질 때까지 함께 생활하였다.

1990년 당시 『일간스포츠』 기자였던 이성부와 만난 이태는 『남부군』에서 양수아를 '양지하'라는 가명으로 묘사한 이유에 대해 양수아가 어딘가 살아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양수아가 1952년 2월 이후 광주에서 재판을 받고, 1953년 6월 목포에서 곽아미와 결혼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리산에 머물렀던 시기는 1952년 초반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상과 추상 사이]

1940년대 말 실험적인 조형성을 보인 드로잉들은 1950년대 비정형 회화와의 연관성을 유추하게 한다. 광복 전후에 나타난 양수아 작품의 표현주의적 특성은 거친 붓질과 강렬한 색채 표현에서 비정형의 방식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임을 추측할 수 있다. 1956년 양수아강용운의 소개로 5월 광주사범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목포를 떠나게 된다. 양수아는 초기의 모방에서 벗어나 앵포르멜 미학을 스스로 자기화하려는 작업에 몰두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1956년 광주로 오면서 더욱 진전되었다. 양수아가 거부한 것은 그림이 하나의 사실이라 하더라도 모방이나 재현을 대상으로 삼는 모델(model), 혹은 에스키스(esquisse)[회화에서 시작을 위한 밑그림]의 반영이라는 회화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양수아의 비정형 회화는 인간 실존과 부조리한 상황의 관계 속에서 빚어진 안료와 행위의 부딪힘으로 나타났다.

1955년에 그린 「자화상」에는 작가의 내적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림 속 양수아의 모습은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소외된 한 인간이 외치는 절규와 흡사하였다. 전쟁은 인간의 정신과 삶 자체를 파괴하는 가공할 만한 폭력성을 지녔다. 양수아가 겪은 실의와 좌절은 자연스레 아카데믹한 방법을 벗어나게 하였으며, 숨 막히는 미술계에서 자유로운 기법을 구사하게 하였다. 1950년 전후 자연주의 계열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미술계 상황에서 추상 자체에 대한 철저한 물음을 제기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 제작된 「작품」은 종이에 유채를 사용하여 물질감과 제스처(gesture)로 인간 내면의 울림을 기록한 것이다. 양수아는 형태의 이미지보다 거칠게 발라진 재료의 '회화적 마티에르(matiere)' 효과를 얻기 위해 물감, 붓, 나이프의 짓눌림을 밀착시켰다. 화면에 남겨진 물질감이 형태의 해방을 의미한다면 표현성이 강조된 색채는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작품」에 담긴 이미지는 마치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의 「인질」 연작과 유사성을 보이는데, 색채나 물감의 두께가 형태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양수아는 앵포르멜 화가들과 같이 이성적 단계에서 벗어나 구상과 추상 사이를 유영하며 '추상의 이미지' 그 자체를 재현하였다. 양수아가 추구한 추상은 미학적·방법론적인 특징과 유사한 앵포르멜 양식으로 나타났다. 앵포르멜에 대한 인식은 같은 전시를 관람한 후 양수아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중앙화단의 제언-한 지방화가로서」에서 보다 명확하게 기술하였다. 양수아는 "추상 회화란 자기 경험의 누적과 감정을 추출한 것"이며 이미 수십 년 전에 시작되어 전 세계적인 조류가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현대 회화를 "'아브[abstract]' 혹은 '슈르[Sur-Realism]'로 전제해 놓고 보는 한국 화단이 과도기는 커녕 초창기에 속한다."고 일침을 가하며, 중앙 화단이 아주 기형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양수아는 "현대 회화란 구상이나 비구상, '슈르'나 '프리미티브(primitive)' 혹은 '앵포르멜'과 같은 양식에 관계없이 세계성, 민족성, 사회성에 입각하여 자기에 가장 충실하려고 할 때 회화 이념은 서 있을 것이고 회화 양식은 그에 따를 것이다."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엥포르멜이란]

광주 화단에서 활동하였던 양수아가 서울의 중앙 화단과는 별개로 추상 회화, 즉 앵포르멜에 대해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앵포르멜 용어를 둘러싼 시대적 담론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앵포르멜은 국제성을 표방하는 한국 아방가르드(avant-garde) 작품들을 하나의 집단 미술로 지칭하는 용어로 차용되었다. 이는 식민 잔재를 탈피하고자 했던 절박한 시점에서 서구화와 동일시하고 현대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국제 아방가르드의 보편주의를 수용하려는 흐름에서 이뤄진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의 앵포르멜 개념은 전통적인 제도의 부정으로서 현대성, 표현의지를 기술하는 보편성을 표방하고 있다.

한국 화단은 경직된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던 전후 분단의 상황에서 전통에 저항하고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형 언어로 추상 미술, 즉 앵포르멜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유럽과 한국 작가들이 가진 문화적인 차이점을 넘어서 전쟁의 파괴적인 결과와 현실적인 상황을 실존적인 위기의식으로 표출하려는 요인이 되었으며, 형식주의에 빠져 있던 구상적 조형의 이론과 기법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한국 앵포르멜은 서구 아방가르드가 유입되기 시작한 전후의 피폐한 상황에서 내면의 절박성에 직면한 청년 작가들에게 새로운 예술을 주체적으로 전개하고 발전시키는 추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실험정신, 즉 전위의식으로 집약되었다.

[호남 앵포르멜의 발전기]

1950년대 초 양수아강용운이 구사한 파격적인 화면은 국내 화단에 전위적 열풍을 일으킨 '또 하나의 예술' 혹은 비정형, 반추상 형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더불어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오토마티즘(automatism),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드리핑(dripping) 등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이 같은 현상은 1950년 전후 광주 미국공보원을 통해 국제적인 정보를 접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움직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작품 제작의 구심점이 된 1950년대는 일제강점기, 해방 공간, 분단 현실, 이념 대립 등 현실의 고통과 갈등을 딛고 치열한 문제의식과 열정을 쏟아낸 초극(超克)의 시기였다. 이 시기를 이른바 호남 앵포르멜의 발전기, 또는 '뜨거운 추상' 시기라고 지칭할 수 있다.

양수아는 광복과 6.25전쟁을 겪는 동안 형태의 부정, 즉 닮은 것의 부정을 전제로 한 작업에서 이미 앵포르멜 양식의 접점에 다가섰다. 양수아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리얼리티와 6.25전쟁을 겪은 실존적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술을 향한 절실한 당위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양수아6.25전쟁 이후 남쪽 사회에서 절대적인 금기였던 빨치산의 일원으로 활동한 점은 암울한 시대와 불운한 삶이 더해져 치열한 작가정신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