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938 |
---|---|
한자 | 遊瑞石山記[梁進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성혜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88년 - 양진영 출생 |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60년 - 양진영 사망 |
배경 지역 |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성격 | 기행문 |
작가 | 양진영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양진영이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을 유람하고 쓴 글.
[개설]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를 지은 만희(晩羲) 양진영(梁進永)[1788~1860]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1488~1545]의 10세손이다. 1859년 사마시에 합격한 양진영은 제자백가(諸子百家)와 노불(老佛)의 학설을 섭렵하고, 특히 역(易)을 깊이 연구하여 『대연추책(大衍推策)』을 지었다. 선비들과 향음례(鄕飮禮)[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일]를 많이 가졌으며, 시작(詩作)에도 뛰어났다.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림이 양진영의 시를 찬탄하여 '풍아명어좌해(風雅鳴於左海)'라고 평하였다. 저서 『만희집(晩羲集)』, 편서 『경학지(經學志)』 등을 남겼다. 『만희집』은 양진영의 유고를 종증손인 양재경이 모으고 송사 기우만이 교정하여 간행한 문집이다. 「유서석산기」는 『만희집』에 실린 9편의 기문 가운데 한 편이다.
[구성]
「유서석산기」는 약 850자로 되어 있다. 무등산을 오르게 된 동기, 이동 경로, 무등산을 유람한 회포 등과 함께 유람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양진영은 「유서석산기」의 도입부에서 사마천(司馬遷)과 상자평(向子平)이 산에 오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음을 언급하며 자신은 가까이 있는 무등산에 오르게 되었다고 유산의 동기를 밝힌다. 이어 무등산에 오른 이동 경로를 상봉→입석대→반석대→풍혈대→서석대→규봉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웅장한 바위의 모습에 감동하는 모습과 무등산의 산세를 상세히 그리고 있다.
[특징]
「유서석산기」는 마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묘사가 특징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곳은 높은 돌길이 사방에서 끊긴 듯하고, 아래로는 지맥이 팽팽하게 펼쳐져 있어서 마치 넓은 뜰 안에 자리를 깔고 상을 펴 놓은 것과 같았다."는 식이다. 또한, 여와(女媧)[중국의 천지 창조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오색석(五色石) 신화를 쓰는 등 여러 전고(典故)[전례(典例)와 고사(故事)]와 비유적인 표현법이 돋보인다. 한편,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호남과 멀리 떨어진 명산에서 호남의 명산으로 그 대상을 좁히며 무등산 유람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양진영의 「유서석산기」는 유산의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기적으로 19세기에 쓰인 첫 무등산 유산기로 평가한다. 뛰어난 묘사 기법과 더불어 "비탈길로 산을 내려오다가 땀이 흐르면 땀을 닦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신다. 옷을 벗고 앉으면 시원한 바람이 서서히 스쳐 간다. 이미 이런 산이 있으니 이런 물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이 물은 나무 사이로 바위를 돌아 아래로 흘러 내를 이루니 이 또한 고난을 무릅쓰고 도달한 것이 아니겠는가[崎嶇下山 汗者 濯焉 渴者 挹焉 解衣而坐 凉颸徐動 旣有此山 不可無此水 而縈林絡石 下注爲川 亦非困蒙 而達者耶]."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의 모습을 인간의 삶과 연관 지어 산수를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것으로 그 가치를 여실히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