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893 |
---|---|
한자 | 無等山-張維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민선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87년 - 장유 출생 |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8년 - 장유 사망 |
배경 지역 |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성격 | 한시 |
작가 | 장유 |
[정의]
조선 전기 문신 장유가 정홍명과 했던 무등산 유람 약속이 공무로 인하여 무산되자 그에 대한 아쉬움을 쓴 한시.
[개설]
「무등산(無等山)」을 지은 장유(張維)[1587~1638]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이다. 1605년 사마시를 거쳐 1609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1606년 겸설서(兼說書)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대사성·대사헌·이조참판·부제학 등을 지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 때도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공조판서로서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 등이 있다.
장유는 「무등산」을 짓게 된 사연을 "일찍이 기옹과 서석산을 유람하기로 기약했는데, 때마침 서쪽 변방에 일이 발생하여 선박 조달과 군량 수송 등에 관한 공문이 빗발치듯하여 약속을 지킬 수가 없으니, 시를 지어 유감의 뜻을 보내노라[증여기옹기서석지유(曾與畸翁期瑞石之遊) 속서석비유사(屬西鄙有事) 조선비만(調船蜚輓) 간서방오(簡書旁午) 불극천약(不克踐約) 이시기한(以詩寄恨)]"라는 글로 나타냈다. 문장 중에 기옹은 정철의 아들 정홍명(鄭弘溟)이다. 「무등산」은 『계곡집』 28권에 수록되어 있다. 작품 말미에 “나의 관소 동쪽에 있는 누각에 올라서면 서석산이 바로 보이기 때문에 다섯째 구절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폐관동루(弊館東樓) 정대서석(正對瑞石) 고제오구운(故第五句云)]”라는 소주(小註)가 붙어 있다.
[구성]
「무등산」은 1구에 5자씩 모두 8구로 이루어진 오언율시이다.
[내용]
암타유기근(暗詫幽期近)[약속 날짜 다가와 은근히 기다렸는데]/ 번성조물간(翻成造物慳)[갑자기 조물주가 인색해질 줄이야]/ 과선촉횡해(戈船促橫海)[병선을 급히 바다 건너 보내느라]/ 납극부심산(蠟屐負尋山)[산 유람하자는 약속을 저버리게 되었네]/ 수색요감읍(秀色遙堪挹)[수려한 산빛 멀리 손에 잡힐 듯한데]/ 정운불가반(停雲不可攀)[멈춰 선 구름도 부여잡을 수 없으니]/ 한망각형역(閑忙各形役)[한가하나 바쁘나 부림을 당하는 처지라]/ 하지파수안(何地破愁顔)[어찌해야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필 수 있을까]
[의의와 평가]
「무등산」은 장유의 시 세계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자 장유와 정홍명의 교유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