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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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蘇海遺稿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고성혜 |
간행 시기/일시 | 1960년 - 『소해유고』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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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전남대학교도서관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33[용봉동 300]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
성격 | 문집 |
저자 | 노종룡 |
편자 | 노진영 |
간행자 | 노진영 |
권책 | 4권 4책 |
행자 | 11행 24자 |
규격 | 27.5×19.4㎝ |
어미 | 상하향일엽화문어미(上下向一葉和文魚尾) |
[정의]
전라도 광주 출신의 근대 유학자 노종룡의 문집.
[저자]
노종룡(盧鐘龍)[1856~1940]의 자는 치운(致雲), 호는 소해(蘇海), 면수(勉修), 농아(聾啞),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는 농암(聾岩) 노재규(盧在奎)이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과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에게 수학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으로 송병선이 자결하고, 1906년(고종 43)에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절하자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의 농암정(聾岩亭) 아래에 소해정(蘇海亭)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44년에 노종룡의 문인과 유림이 그를 추모하여 만주사(晩州祠)를 세우고 제향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소해유고(蘇海遺稿)』는 아들 노진영(盧軫永)이 1941년에 고광열(高光烈)의 서문과 1948년에 노철수(盧澈秀)의 발문을 받았으나 출간하지 못하고 1959년에 고윤주(高允主)의 후서(後序), 1960년 송재성(宋在晟)의 묘표(墓表)를 받아 1960년에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소해유고(蘇海遺槁)』는 4권 4책의 석인본이다. 전체 크기는 27.5×19.4㎝, 사주쌍변(四周雙邊)으로 반곽(半郭)은 21.7×15.1㎝이다. 행마다 경계가 있다. 행자수는 11행 24자로 상하향일엽화문어미(上下向一葉和文魚尾)이다.
[구성/내용]
『소해유고』는 권1에는 「서석산부(瑞石山賦)」 등의 부(賦)와 시가 실려 있고, 권2에는 서(書)가 실려 있다. 권3에는 소(疏), 잡저(雜著), 기(記), 발(跋), 잠(箴), 사(辭), 혼서(婚書), 축(祝), 상량문(上樑文)이 실려 있으며, 권4에는 제문(祭文), 묘갈명(墓碣銘), 행장(行狀), 전(傳) 등이 실려 있다. 이외에 부록은 4권, 속집은 권1로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소해유고』에는 비교적 근대 학자인 노종룡과 관련한 기록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노종룡은 고을 유림들의 추앙을 받던 인물인 동시에 교유하였던 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지역 문학 연구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