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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궁암 유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545
한자 泣弓岩由來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압촌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염승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1년 - 「읍궁암 유래」 광산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광산군지』에 수록된 설화를 전재(轉載)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읍궁암 유래」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
관련 지명 봉산정사 엄이재 -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산79번지 지도보기
성격 설화|지명전설
주요 등장 인물 고광선
모티프 유형 지명유래|충절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압촌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광선이 은둔했던 읍궁암에 관한 이야기.

[개설]

고광선(高光善)[1855~1934]이 거주했던 봉황산 중턱에 위치한 읍궁암(泣弓岩)에 관한 지명전설이다. 고광선읍궁암에서 고종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푸른 이끼가 되었다고 한다.

[채록/수집 상황]

「읍궁암 유래」는 1981년 광산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광산군지』에 수록된 설화를 전재(轉載)하여,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내용]

옛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성품이 청직(淸直)하였다. 그러나 자칫 이성에만 치우쳐 결단하는 일에도 치우치고, 세상을 달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현와(弦窩) 고광선은 성품이 강직하고 청빈한 인물이었다. 고광선은 기묘명현(己卯名賢)[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 중 한 사람인 하천(霞川) 고운(高雲)[1495~?]과 충렬공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직계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비범한 행동으로 남다른 인물이었다.

고광선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1826~1885]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고광선은 가거북촌[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1905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의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고, 민영환(閔泳煥)[1861~1905]과 조병세(趙秉世)[1827~1905] 등 여러 지사(志士)들이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광선은 분격하여 집을 떠나 광주 서창면 용두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용두동]에 있는 봉황산 중턱에 엄이재(掩耳齋)를 짓고 은둔하였다. 고광선은 모든 인연을 끊고 삶을 마치고자 하였으나, 인근 선비들이 소식을 듣고는 고광선이 거처하는 산중 처소로 몰려들어 봉황산 일대가 강학과 독송 소리로 메아리쳤다. 이때 고광선은 제자들에게 학문뿐만 아니라 구국의 지절(志節)을 일깨우면서 선비가 갖춰야 할 도덕적 의무와 사변(思辨)을 가르쳤다.

또한, 고광선이 머무른 봉황산 중턱에는 임금의 능(陵)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국책을 회복하려다 죽은 고종(高宗)[재위 1863~1907]을 흠모했던 고광선은 바위에 읍궁암(泣弓岩)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고광선읍궁암을 고종의 능묘로 생각하고, 아침저녁으로 꿇어앉아 3년 동안 곡을 하였다. 읍궁암에 흘린 고광선의 눈물은 이후 푸른 이끼가 되어 아직까지 선연히 남아 있다고 한다. 고광선이 죽은 후에 1964년 향교 유림들이 봉산사(鳳山祠)로 이름을 고치고, 고광선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봉산사는 폐절(廢絕)되어 터만 있고, 봉산정사 엄이재만 남아 있다.

[모티프 분석]

이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구국을 향한 충절'이다. 고광선은 나이 마흔이 넘어 갑오농민운동을 비롯하여 구한말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그리고 고종의 죽음을 목도(目睹)하자, 봉황산으로 들어가 엄이재를 짓고 은둔하였으나, 인근의 유생들이 엄이재로 몰려들자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읍궁암 유래」에서 고광선은 봉황산 중턱에 있는 바위를 고종 임금의 능묘로 생각하고 3년 동안 곡을 하였다. 고광선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충심과 절개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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